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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건조 Oct 07. 2021

<15화> 비디오 키드의 생애

주성철 영화평론가




   “<로드쇼> 창간호를 1억 원에 삽니다”라는 말에 현혹되어 당시 한 달 용돈의 절반을 털어 1989년 <로드쇼> 4월호 창간호를 두 권 샀었더랬다. 당시 가장 ‘힙한’ 영화잡지가 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던 <로드쇼>를 한 권은 소장용, 한 권은 자유롭게 오려서 코팅 책받침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표지 모델이 무려 소피 마르소였다. 기억에 남기로는 배우 박중훈과 함께 이른바 ‘스크린 카페’를 탐방했던 기사와, ‘데이트 인터뷰’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홍콩 배우 주윤발과 한국 배우 이혜영의 인터뷰 기사가 유독 선명하다. 이미 영화 월간지 <스크린>을 보고 있던 때 경쟁지 <로드쇼>가 그렇게 등장했다. 1억 원 이벤트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저희가 만든 창간호를 되돌려 삽니다. 1989년 4월호 창간호는 10년이 지난 뒤에는 1,000,000원이 됩니다. 가급적 파손을 피해주시고 10년 동안 보관하시면 횡재를 하실 수 있습니다”라며 “당첨자는 경찰관 입회 아래 공정하게 100명을 추첨하여 각각 1,000,000원씩을 드린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당시 ‘복권 당첨금 1억’이란 금액은 상전벽해하여 새 인생을 꾸릴 수 있는 꿈의 금액이었다. 물론 1억 원을 다 준다는 게 아니라 100명을 추첨하여 백만 원 씩 준다는 얘기이긴 했으나, 그 또한 어린 나이에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심지어 극장 영화 관람료가 2,500원이던 시절이었으니(분식점 라면은 1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 3,500원짜리 <로드쇼>가 10년 후에 1,000,000원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에 부리나케 서점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하지만 <로드쇼>는 그 10년이 되기 불과 몇 개월 전인 1998년 폐간했다. 패배주의에 물들어서 1997년 IMF 금융위기의 여파 때문일 거라고, 오히려 <로드쇼>를 불쌍하게 여기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달랐다. 코 묻은 용돈으로 영화잡지를 사던 어린 친구들에게 그런 천인공노할 사기를 치다니, 젠장. 


   비록 <로드쇼>는 허망하게 사라졌지만, 우리에게는 ‘비디오’라는 도피처가 있었다. 1990년대 영화광들의 가장 큰 무기가 바로 비디오였다. 아주 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로 쥐가 노니는 허름한 동시 상영관을 떠나 가가호호 VHS 비디오 플레이어라는 무기를 장착하게 된 것이다. 조금만 발품을 팔면 몇몇 전설의 비디오 대여점을 찾아서 기어이 원하는 영화를 원하는 때 볼 수 있었다. 선배 영화광 세대처럼 프랑스문화원이나 독일문화원에 가지 않고도, 책을 통해 풍문으로만 알고 있던 고다르와 트뤼포의 영화를 보게 됐으니 책과 영화, 즉 이론과 실제의 괴리도 줄어들어 갔다. 물론 그런 걸작들 외에도 ZAZ 사단의 코미디 영화들, 스티븐 시걸의 액션 영화들을 발견하는 쾌감을 받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잡지를 사면 제일 먼저 뒤적이는 것이 바로 후반부의 ‘비디오 추천’ 코너였다. 영화광들에게 90년대는 동시 상영관이나 문화원이라는 양극화 현상을 넘어, 그리고 책에서 벗어나 비디오숍으로 옮겨가게 된 대전환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현재의 OTT 서비스와도 같은 맥락일 텐데, 영화광들이 이젠 굳이 ‘야외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당시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비디오숍 점원 출신의 영화광이 정식 영화학과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직원 신분을 이용하여 닥치는 대로 그 비디오들을 보며 스스로 영화 문법을 익혀 <저수지의 개들>(1992)로 데뷔하고, 급기야 <펄프 픽션>(1994)으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이야기는 영화를 꿈꾸었으되 그와 무관한 전공으로 살아가던 수많은 영화소년소녀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했다. 거기에 ‘나도 캠코더만 있으면’ 마치 당장이라도 칸영화제로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은 헛된 망상도 심어주기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니 당시 1994년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핵폭탄’이라는 어마무시한 상호를 가진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주 목적이 바로 캠코더 구입 비용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비용은 전자제품점에 당도하기 전 이미 술값으로 탕진하고 말았다. 


   1980년대 후반 들어 가정용 비디오 플레이어 보급률이 1가구 1대 수준으로 높아지면서 비디오 대여점은 호황을 맞았다. 동시 상영관에서 담배 피는 아저씨, 컵라면 먹는 아저씨 옆에서 영화 보던 일은 단숨에 ‘저개발의 기억’이 됐다. 하지만 ‘합법 다운로드’와 ‘OTT 서비스’가 없던 시절, 출시 최신작 비디오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그야말로 치열했다. 은퇴하면 비디오 대여점을 차리겠다는 중년들이 치킨집을 차리겠다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정식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이른바 ‘보따리장수’들에 의지하던 만화 대여소의 은밀한 불법 ‘B자 비디오’(정품이 아닌 복사본을 대여해주는 것으로 당시 신작 영화들도 이렇게 흔히 유통됐다) 상영회도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됐다. 하지만 릴리아나 카바니의 <비엔나 호텔의 야간 배달부>(1974)나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퍼블릭 우먼>(1984), 그리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978)를 비롯한 싸구려 이탈리아 호러 영화들의 인기 B자 비디오들은 ‘불법 복제’라는 이름으로 손에 손잡고 공유됐다. 모여서 보지 않을 뿐 ‘복제’는 비디오라는 문명의 이기가 부리는 황홀한 마술이었다. 당시 우리에게 영화란 발터 벤야민이 얘기한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그 자체였다.


   음침한 동시 상영관과 B자 비디오가 남성 영화광들만의 전유물이었다면, 비디오 대여 시대가 열리면서 숨죽이며 살았던 주변의 여성 영화광들도 기하급수적으로 커밍아웃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을 뿐 어딘가에서 영화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있었을 그들을 비로소 ‘양지’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길버트 그레이프>의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아리조나 유괴작전>의 니콜라스 케이지, 그리고 <허공에의 질주>의 리버 피닉스를 발견하게 됐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당연하게도 <로드쇼>와 <스크린>같은 영화잡지를 사기 위해 서점 앞에 줄 선 이들 역시 남자들만은 아니었다. 그저 나만이 동시 상영관에 죽치고 살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문화원이나 각종 동호회들이 영화와 정보를 독점하던 시절을 넘어, ‘1,500원에 1박 2일’(‘구프로는 1,000원에 2박 3일’ ‘무협비디오 시리즈는 개당 500원에 1주일’ 등 약속은 지역마다 천차만별이다)이라는 약속을 지키고 “너만 봤냐? 나도 봤다!”를 외치는 씨네필의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구하지 못한 영화를 보기 위해 굳이 어떤 단체나 동호회의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90년대 영화문화의 데탕트는 그렇게 VHS 비디오를 타고 시작됐다. 


   나 역시 한때나마 장래에 비디오숍을 차리고 싶다는 꿈을 꽤 오래 간직하고 있던 ‘비디오 세대’였다. 이후 2000년대 들어 DVD와 블루레이, 그리고 현재의 OTT 서비스 시대로 넘어오기 전까지, 책으로 제목만 알고 있던 영화들을 빌려볼 수 있게 된 시대, 싼 가격에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시대, 그렇게 비디오 문화의 확산이 ‘문화원’과 ‘동시 상영관’을 중심으로 결집된 배타적 씨네필 집단 내에 성평등과 민주화를 가져왔다, 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계속>




   주성철 영화평론가

   前 「씨네21」 편집장 

   前 「필름 2.0」 기자 

   前 「키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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