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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마음 May 30. 2024

힘들지만 행복하다.

  

5월 2일 퇴원하신 엄마가 우리 집으로 오셨다.




한 달 전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형부의 출장에 맞춰 한국에 들어와 3주 정도 머물다 갈 예정이라 했다.

우리 삼 남매는 카톡으로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짰다.

5월 초에는 3박 4일 여행을 가고, 그다음 주는 음..

신나게 우리의 일정을 잡아가며 일주일이 지나갈 무렵, 엄마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복숭아 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우리의 모든 일정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엄마가 집으로 오시기 하루 전날 언니는 예정대로 한국에 도착해 우리 집으로 왔다.

병원에서의 간병에 이어 이제 우리 집에서의 간병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나마 언니가 와서 내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언니는 그동안 엄마의 대소사가 있을 때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힘껏 도와주었다.


앞 서 팔을 다치셨을 때는 걸어 다니실 수 있으셨으니 그래도 덜 힘들었는데, 다리를 다치시니 움직이실 수가 없어 엄마의 모든 동선에 함께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혀드리고는 식탁으로, 화장실로, 거실로, 침실로 이동하였다.

목욕의자를 사서 머리를 감겨드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부터는 깁스한 다리에 대용량 비닐봉지를 씌우고 샤워도 시켜드렸다.


5월의 절경에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우리 자매였지만, 첫 일주일 동안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어 그저 베란다에 나가 푸른 하늘과 꽃과 나무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밤이 있었다.

주무실 시간이 되어 엄마를 침대에 눕혀 드리고 나오면 언니와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하루도 빠짐없이 취침 전 수다를 떨었다.

요즘 화장품은 뭘 바르는지, 영양제는 어떤 것을 먹고 있는지, 몸이 아프지는 않은지, 병원은 어디를 다니는지, 이것은 좋더라 저것은 별로더라 해가면서 밀린 이야기보따리를 풀곤 했다.

나는 이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동생은 며칠에 한 번씩 들러 함께 저녁을 먹었고 주말이면 온 가족이 모여 술도 한잔씩 했다.

우리 삼 남매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시절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우리들의 추억을 떠올리며 깔깔거렸고 진한 행복을 나누었다.

어버이날과 하루 차이인 언니의 생일은 어버이날 축하식에 얹어 간단히 퉁쳤다. 그날의 행사는 동영상으로 찍어 두었는데, 어버이날 축하노래가 끝나 엄마가 촛불을 끄시자마자 서둘러 초를 새로 꽂고, 이름만 바꿔 부른 똑같은 축하노래에 신나게 박수를 치던 모두의 모습이 다시 봐도 얼마나 웃기는지..


매년 10월에 나오는 언니가 5월에 오니 생일도 함께 할 수 있어 좋았고, 산책을 시작하면서부터 찍기 시작한 사진의 배경이 가을에서 봄으로 바뀐 점도 나름 신선했다.

함께 여서 좋았던,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그런데 나의 몸이 지쳐간다.

배달음식을 먹거나 외식을 한 경우도 몇 번 있었지만 매일같이 집에서 삼시 세끼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 아니 그 메뉴를 생각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외식 한 번할 때도 어디를 갈지 내내 고민하는데 매 끼니마다 무얼 해서 먹을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남편과 둘이 있을 때에는 만들어 놓은 밑반찬과 한 두 가지 메인요리를 해서 간단히 차려먹었는데, 편찮으신 엄마와 몇 달 만에 우리 집을 방문한 언니를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식사를 하면서도 다음 메뉴에 대한 고민을 하곤 했다.

다 함께 모여 저녁식사 후 술이라도 한잔 하는 날이면 깔깔거리고 웃고 떠들다가도 이걸 언제 다 치우고 자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와 온전히 즐기지 못한 때도 있었다. 집주인의 비애다.

모든 관절과 어깨, 허리에서 오는 통증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지만 내가 아프다고 손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행복과 힘듦이 공존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주 언니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며칠이 지나, 누나를 걱정하는 동생이 엄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

엄마는 그동안 우리 집에서 목발 두 개로 걷는 연습을 하셨는데 다리에 힘이 없으셔서인지 여간 힘들어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동생 집으로 모셔다 드린 바로 그날 나는 엄마께 목발 하나로 걸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뜬금없는 제안을 드렸고 엄마는 그게 되겠냐 하셨지만 공하셨다. 오히려 두 개의 목발을 사용하시며 연습하실 때보다 너무나 훌륭히 잘 걸으시는 게 아닌가?

그날은 우리 부부가 엄마를 모셔다 드리고 다 같이 밖에서 저녁식사 겸 술자리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엄마는 한 개의 목발에 몸을 의지하여 마침내 땅을 밟고 외출을 하시게 되었다. 엄마의 휠체어 외출은 바로 그날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다행이다. 이제 스스로 움직이실 수 있으니 엄마도, 동생도 그나마 덜 힘들 거란 생각에 조금은 마음을 놓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언니는 10월에 다시 한국으로 온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언니네 가족을 모두 이끌고 우리 집으로 올 것이다.

나는 또 힘들겠지만 행복하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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