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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마음 Jul 11. 2024

대화의 정석

대화는 쌍방이다.


장마기간이라 그런지 아픈 곳의 통증이 조금은 심해진 듯하다.

틈틈이 마사지 기계와 찜질로 순간의 통증을 잠재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덕에 그리 덥지 않은 여름을 보내고 있지만 레인지에서 꺼낸 곡물찜질팩을 어깨에 대고 있으려니 땀이 쉬지 않고 흘러내린다.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야 하는데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육체가 조금은 원망스럽다.


문득 통증으로 병원을 찾기 시작하던 2년여 전의 일이 생각난다.


1. 첫 번째 의사 선생님

처음으로 찾은 곳은 통증 클리닉이었다.

환자들이 제법 많았던 이곳은 통증 클리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한 50대 이상의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다림 끝에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께서 나의 증상을 물어보시고는

눈을 맞추시며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다. 고개를 끄덕이며 적절한 타이밍에 공감 어린 말씀도 해 주신다. "에휴, 많이 아프셨을 텐데.", "회사일 하시면서 많이 힘드셨겠네요.", "앞으로 힘든 집안일은 남편분께서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등등.

치료도 받지 않았고 의사 선생님과 상담만 했을 뿐인데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2. 두 번째 의사 선생님

두 번째 찾은 곳은 가정의학과이다.

회사가 즐비한 곳에 위치해서인지 젊은 환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선생님 앞에 앉은 나는 질문에 맞춰 대답을 한다.

그런데 이 선생님 나의 말을 자꾸 반토막 낸다.

내가 주저리주저리 길게 얘기한 것도 아니고 짤막한 한 문장을 얘기했을 뿐인데도, 자신이 듣고자 하는 말 외에는 듣지를 않고 바로 자신의 다음 질문을 시작한다.


"통증이 느껴진 게 언제부터인가요?"

"4~5개월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목 뒤 어디가 아프다는 말씀인가요?"

"머리 바로 아래 목부분부터 날개 (부분까지 아픕니다.)"

"어떻게 아픈지 얘기해 보세요."

"무거운 물건이 내리누르는 (것처럼 아픕니다.)"

괄호 안의 말들은 모두 잘려 나갔다.

분명 일방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대화'라는 것을 한 것 같은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왠지 모르게 갑을 관계가 형성된 것 같았다.


3. 세 번째 의사 선생님

관절 통증으로 나는 정형외과를 찾았다.

내가 방문한 시간에는 환자가 아무도 없어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진료를 받았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의사 선생님은 내가 진료실로 들어서자마자 "뼈마디가 아프다고?" 하고 물어보셨다. 데스크에서 간호사와 얘기를 나눴는데 그 내용이 전달되었던 것 같았다.

반말로 시작하셨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보다 연세가 있어 보이시니 반말을 하실 수도 있지, 또 이런 게 친근감도 느껴지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좋은 상담으로 이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디가 아픈지, 증상이 어떤지를 물어보시길래 나는 아픈 부위를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을 했다.

"여기랑, 여기랑 여기요."

의사 선생님은 아프다고 말씀드렸던 주위를 꾹꾹 누르시며, 통증이 느껴지는 곳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셨다.

나는 아프지 않은 곳은 건너뛰고 통증이 느껴지는 부분에서 "네, 거기가 아파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 상황은 뭐람?

"그럴 리가 없어. 여기는 아플 리가 없지"

당사자가 아파서 아프다고 얘기하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는 건 뭐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병원에서? 게다가 내가 아픈 곳을?

황당했지만 당장 답답한 사람은 나였기에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부어서 구부리기가 힘들고 구부리면 손가락 뼈마디에 통증이 있어요."

의사 선생님의 뒤이은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도 일어나면 손이 퉁퉁 부어."

K.O패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와 X-ray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결론은 퇴행성 관절염.

나름 예상했었던 이 결론을 듣기 위해, 내 마음은 상처라고 말하기도 싫은 상처를 받았다.

병원을 나오는데 힘이 하나도 없다. 주차하느라 조금 늦게 달려온 남편이 나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가서.., 밖에 가서 얘기할게."

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뭐 이런 경우가 있지?"로 시작하여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참았던 울분을 토해냈다.

"다시는 그 병원 가나 봐라."로 결론을 냈지만 마음이 쉽게 누그러지지는 않았다.

환자가 없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런 병원을 찾아간 나를 자책할 수밖에.



대화 : 서로 마주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의사소통 방식(네이버 사전)


나는 세 분의 의사 선생님과 서로 마주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은 상황이다.

그러니 형식은 갖춰진 셈이다. 하지만 대화의 정의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사소통이라는 과제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소통 :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진료도 일종의 대화다.


첫 번째 선생님의 경우,

서로 마주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며,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하여 오해 또한 없었으니 대화의 정석이 바로 이러한 것이리라. 게다가 마음의 위안까지 선물로 받았으니 감사와 존경은 덤으로 따랐다.

하지만 2,3의 경우 나의 말은 잘려나갔고, 막혔으며 서로 통하지 아니하였다.


가족 간의 대화든 친구들과의 대화든, 본의 아니게 중간에 끼어들게 되거나 자신의 말에 너무도 확신을 가져 상대방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어찌 단 한 번도 없겠는가?

하지만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우리는 가볍거나 묵직한 사과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확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 나간다.

말실수를 했다고 해서 대역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성과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래서 도를 넘나드는 한마디한마디가 정형화된 습관으로 굳어진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 채 끝이 나고 말 것이다. 내가 그 병원을 다시 찾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한 문장을 되뇌어 본다.

'대화는 일방이 아닌 쌍방이다.'



사진: Unsplash의 Susan Q Y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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