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선택지는 하나
철이 없었죠. 여행이 좋아서 여행사에 취업했다는 게...
첫 자기소개서를 쓰는 순간 알게 되었다.
내 스펙은 보잘것없었다. 동기들 다하는 회계사 공부하기 싫다고, 나만의 꿈을 찾고 싶다고 대학생 내내 여행을 다니더니 응당한 결과였다. 공모전이나 대내활동은커녕 그 흔한 자격증조차 없었다. 그나마 있는 건 토익점수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몇 안 되는 대외활동이었다. 그나마 학점은 괜찮은 편이었다.
스펙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언가를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때의 나는 노력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학점, 토익과 그리고 몇 안 되는 대외활동을 믿고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아무 데나'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심적으로 힘든 나날들이었다.
매번 지원동기를 지어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더 힘든 건 가고 싶은 데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으니 가고 싶은 곳은 더더욱 없었다. 이 암담한 상황에서 그래도 내게 맞는 회사를 찾으려면 나의 성향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도전적인 성향인지, 안정적인 성향인지, 복지가 좋은 곳을 원하는지, 연봉이 높은 곳을 원하는지 남자 친구도 부모님도 알려주지 않았다.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그렇다면 마음에도 없는 회사에 지원할게 아니라 잠깐 멈추고 시간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뭐가 그리 급했을까? 스무 군데가 넘는 곳에 마구잡이식으로 지원을 했고 한 곳에 최종 합격을 했다. 이름을 들으면 모두가 아는 모 여행사 회계팀에 합격을 했다. 최종 합격을 했으니 기분은 당연히 좋았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던 곳은 아니었다.(간절히 원하던 곳도 없었다) 그나마 여행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여행사에 가면 여행을 많이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고민할 시간은 짧았다. 최종 합격 발표일로부터 며칠 뒤에 바로 신입사원 교육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엉겁결에 가족들로부터 축하를 받으며 입사를 결정했다.
신입사원 교육은 한 달 동안 진행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활기차게 보낸 한 달이었다. 동기는 약 80명, 여행사에 지원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다들 밝고 붙임성이 좋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그중 나와 맞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평일에는 연수를 받고 주말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취업 턱을 내면서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했다.
정신없는 한 달의 끝은 신입 해외연수였다. 여행사답게 방콕으로 연수를 갔다. 회사는 하루라도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밤 비행기에 우리를 태워 보냈다. 자유시간은 거의 없었다. 낮에는 각 조별로 만든 패키지 상품을 검토하는 미션을 수행했고 밤에는 교육을 들었다. 하지만 그저 즐거웠다. 소극적인 대학생활을 보낸 탓에 그 시간이 더 즐거웠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라도 고민을 시작했어야 했다. 월 200이 안 되는 초봉을 들었을 때, 회사의 안주하는 문화를 들었을 때 이 회사가 내가 몇십 년 다닐 수 있는 곳인지 생각해봤어야 했다. 하지만 당장의 즐거움에 고민은 묻혀버렸다. 물론 그 대가는 몇십 배의 고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