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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딩거 Feb 13. 2023

검은색 꽃을 갖고 싶었던 욕망의 결과

인생 첫 생화염색이 안겨준 실패, 그리고 회고

예전부터 꽃시장너무 가보고 싶었다. 그 공간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뭔가 상상 속의 유니콘 같았달까. 심지어 밤 12시~정오까지만 장사를 하기에 아침 일찍 가야 하는 오묘한 꽃시장. 기대에 부풀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내가 꽃을 사 오기만 하면 딱히 쓸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결정된 꽃염색. 어렸을 때 과학책에 나왔던, 꽃 염색을 실제로 한다니 더 기대가 됐다. 특히 검은색 꽃을 본 적이 없어서인지 검은색 꽃을 꼭 만들어보고 싶었다.


고터 꽃시장을 가는 길은 찾아놨음에도 엄청 헤맸다. 경부선만 따라가면 된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길을 잃고, 제대로 찾았나 싶었는데 다른 길로 들어가고. 정말 길치 닉값 제대로 했다. 그래도 어찌저찌 도착한 꽃시장. 지난주까지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서 폐쇄됐던 꽃시장이었기에 출입통제를 진짜 빡세게 했다. 모든 절차를 마친 꽃시장은 마감 1시간 전이었기에 꽃이 많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특유의 꽃냄새가 좋았다. 카네이션이 꽃염색이 잘된다고 해서 카네이션을 찾으러 다녔다. 나는 모든 집에서 비슷한 꽃을 다룰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집마다 다루는 꽃이 달라서 신기했다. 그리고 방문객들은 나를 제외하고 꽃을 굉장히 잘 알았다. 듣도보도 못한 이름들이 오가는데 와우,,,, 연분홍 카네이션을 사고 지하에서 식용색소를 사러 갔다. 여기가 패착 포인트다.


식용색소를 찾던 도중, 사람들이 줄을 선 곳이 보였다. 바로 찹쌀떡집. 줄을 섰다면 맛있겠지 하고 같이 섰다. 즉석에서 만들고 포장하고 결제해서 그런지 앞에 사람이 10명도 안 됐는데 40분 이상 기다렸다. (집에 와서 먹어보니 세상 맛있었으나 기다리는 건 싫다...)


찹쌀떡을 들고 한가람문구로 갔다. 놀랍게도 파는 식용색소...!!! 검은색은 양이 쓸데없이 너무 많아서 보라색, 파란색, 청록색을 샀다. 그리고 다이소에 가서 원예용 가위, 플라스틱컵, 검은색과 색 아크릴물감을 샀다. 여기가 두 번째 패착요인이다.


집 들어가기 전에 찍은 이쁜 연분홍 카네이션


집에 도착하자마자 염색을 준비했다. 한 시간이면 된다길래 색소와 물감을 잘 타서 꽂았다.


염색하려고 물에 탄 식용색소와 아크릴물감


한 시간을 기다려도 염색이 안되길래 줄기가 길어서 그랬나 싶었다. 하지만 3시간을 기다려도 염색이 안 됐다. 그제서야 검색을 했고, 아뿔싸. 이파리도 다 떼고 줄기도 사선으로 잘라야 한다고 한다. 부랴부랴 모두 다듬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도 염색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검색을 해봤다. 알고 보니 식용색소는 염색하는데 72시간이 걸린다고 했다.....ㅎ.... 꽃전용 염색약과 다를 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차원이 다르게 오래 걸렸다. 72배 차이라니..


약 9시간만에 보인 염색의 흔적

아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는 염색이 완전히 다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빠르게 생화염색약을 주문했다. 다음에는 실패 없이 꼭 검은 장미꽃을 만드리라. 재미있으면서 허탈한 11월 10일의 일기. 끝.



2021년 11월 10일에 저장했던 글 오랜만에 꺼내보니 감회가 새롭다.


놀랍게도 실패 이후 생화염색약으로 3~4번의 도전을 했으나 결국 검은색 꽃을 만들지 못다.


생화염색약으로 염색한 꽃들. 기깔나게 잘 된 염색에 신나서 찍은 사진. 검은색 꽃을 만들지 못한 아쉬움을 담기라도 한 듯이 초점이 흐릿하다.
검은색 꽃을 만들지 못한 오기로 만든 반반 꽃. 첫 번째는 참을성 부족으로 망했지만, 두 번째는 나름 이쁘게 됐다.

실패는 끈기보다는 포기를 선물했다. 정확히는 흥미를 잃었다.


포기했다는 허무한 결과임에도 2년 전 글을 발행한 이유는 단순하다. 2023년이 시작될 때의 나는 삶의 엔진이 꺼진 기분이었다. 생각없이 수동적으로 살게 되면서 헛헛함과 공허함만 남았던 상태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꺼낸 서랍장 속 글에는 무수한 도전이 기록되어있었다. 무언가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으니, 지금도 조금만 더 예열한다면 그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보였다.


실패 덕분에 포기를 알았고, 실패 덕분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도전을 할 원동력도 찾았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 언젠가 흥미를 되찾았을 때 다시 도전해볼 수 는 용기가 생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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