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찔찔이 시절, <아메리칸 홈비디오>를 보면서 외국의 유머는 나와 다르구나를 처음 느꼈다. 그 이후로 <오피스>, <모던패밀리> 등등 재밌다고 소문난 여러 드라마를 접하면서 더욱 느꼈다. 진짜 개그코드가 다르구나. 반대로 <프렌즈>, <빅뱅이론>은 취향저격이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해외의 개그코드는 정확히 뭘까, 해외 사람들은 뭘 보고 좋아할까. 그래서 시간이 붕 뜰 때,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심심할 때, 그 어떤 때든 넷플릭스 전 세계 순위(https://flixpatrol.com/)를 보러 간다.
사이트를 구경하면서 우리나라 작품을 세계에서 꽤 많이 보는구나와 더불어서 외국에서는 이런 게 유행이구나 를 느낀다.
(좌) 넷플릭스 전세계 순위 / (우) 7월 4일 기준 작품 1등인 <위쳐(The Witcher)>의 시청률 지도
사실, 사이트에 올라온 작품을 다 보지는 않는다. 누구나 그렇듯, 관심 가는 작품만 본다. 예를 들어 최근 우리나라에서 유명했던 <기묘한 이야기>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마블영화처럼, 세계관이 너무 방대해 그걸 다 습득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급작스럽게 관심을 가진 건 <네버 해브 아이 에버>였다.
네버 해브 아이 에버 시청률 (좌) 2022 시즌3 / (우) 2023 시즌4 (출처 : 팩스턴역 배우 대런 바렛 인스타그램)
전 세계를 강타한 작품의 경우, 대부분 세계관이 강렬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네버 해브 아이 에버>는 어디서 봤던 하이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기 시작했다.
<네버 해브 아이 에버> 시즌4 포스터
총평으로는 예상 그대로, 어디서 봤던 하이틴이었다. 그럼에도 재밌었던 이유는 정말 가볍게 볼 수 있는 PC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드라마든 영화든 메시지를 대놓고 드러내는 작품에게 정이 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 거부감이 든다. 재밌게 즐기고 싶은데 갑자기 내게 교훈을 떠먹여주려는 것이 달갑지 않다. 특히 PC주의적 작품에는 더더욱 메시지가 가득 차있다. 그래서 PC작품이라고 하면, 이전의 경험 덕분에 우선 기대감부터 낮다.
근데 <네버 해브 아이 에버>는 다르다. '하이틴 드라마는 백인이 주인공이다'를 깨부셨다는 걸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출연진의 외형만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인 인도인부터 중국인, 유대인, 백인, 흑인까지. 출연진들의 배경도 참 PC다. 가벼운 이혼부터 재혼, LGBT, 섭식장애, 다운증후군 다양하게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출연진의 인종나 배경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연애'에만 주목한다. 레즈비언인 패비올라가 친구들에게 아웃팅을 고민하는 장면은 있지만, 아웃팅 후에 놀리거나 손가락질하는 장면은 없다. 다운증후군인 친구의 여동생을 도와줘야만 하는 사람이 아닌, 본업인 패션디자인을 기깔나게 하는 학생으로 표현한다. 인종이 문제인 경우는 단 하나, 인도인 할머니의 고지식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촌언니의 비인도인과의 교제를 반대할 때일 뿐이다.
'연애'에만 미쳐있는 드라마인 만큼 연애 장면도 정말 다채롭다. 어느 정도냐면, 새로운 출연진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무조건 누군가와 사귄다. 이건 단순히 주인공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새로운 할아버지가 나오면 할머니와 사귀고, 새로운 여자가 나오면 주인공의 전남친과 사귄다. 유일하게 연애를 보여주지 않은 출연진은 주인공의 상담사 정도였다. 심지어 사귄 뒤에 꽁냥꽁냥하는 장면도 그렇게 길게 보여주지 않는다. 썸타기 + 고백하기 + 헤어지기에 초집중한다. 거기에 불같은 성격의 여주가 사고 치고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하기가 곁다리로 들어간다. 덕분에 설렘과 풋풋함, 그리고 성장서사가 주는 대견함이 휘몰아친다.
그렇기에 정말 가볍게 볼 수 있는 드라마다. 심지어 올해 시즌4를 마지막으로 종영까지 했으니 몰아보기에 완벽하다.
다만, 이 드라마의 가장 호불호가 갈릴 연출인 '나레이터'가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일반적인 나레이터라면, 주인공이 본인의 속마음을 독백하듯이 읊조리는 것이었다. 반면 이 드라마는 출연도 하지 않는 유명 운동선수가 나레이터로 등장해 출연진의 행동을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설명해 준다. 초단위로 표정이 바뀌는 주인공을 보면서 초단위의 생각을 알려준다. 가끔은 운동선수였던 본인의 과거를 들먹이며 2등으로 밀린 출연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둥 드립을 치기도 한다. 심지어 주인공의 시점이 달라질 때, 그러니깐 여자주인공 시점에서 썸남 시점으로 바뀌었을 때 나레이터도 같이 바뀐다.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서 신선한 것 같은데, 만약 한국어였다면 솔직히 별로였다고 느꼈을 것 같다.
뻔한 걸 뻔하지 않게 보여주는 것만큼 대단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뻔한 하이틴 서사에 재미없는 PC를 뿌렸음에도 재미를 끌어냈기에 대단한(?) 작품이다. 인생작품까지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생각 없이 재밌고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작품으로는 당당히 순위권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