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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딩거 Aug 25. 2023

Backup or Share?

컴퓨터의 사망선고가 준 조롱과 위로

컴퓨터가 죽었다. 전날까지 멀쩡하게 잘 켜지던 컴퓨터였는데.


그날, 그러니깐 8월 22일. 컴퓨터는 '자동 복구 준비 중'이라는 달콤한 말로 속내를 감춘 무한 루에 갇혔다. 도르마무였다면 원하는 걸 들어주고 풀려났을 텐데, 컴퓨터는 뭘 해줘도 다 거절하길래 수리기사님을 불렀다.


'수리기사님은 마법을 부려주실 거야'라는 믿음은, USB 하나 인식 못하는 컴퓨터 앞에서 무너졌다.

"가져가서 세밀하게 봐야 할 것 같은데, 자료는 D드라이브에 있나요?"


그렇다며 당당하게 얘기했다. 이전 컴퓨터 수리에서 자료를 온전히 보관하고 싶으면 D드라이브에 저장하는 게 중요하대서 그 뒤로 쭈욱 D드라이브에 저장해 놨기 때문이다. D드라이브라면 내 자료는 온전할 거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리고 내 어리석음을 깨준 수리기사님의 질문, "혹시 백업하셨나요?"


정신이 아득해졌다.

'백업이요? 그럴 리가요. 컴퓨터의 ㅋ도 모르지만,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조립식 컴퓨터를 마련한 저인걸요. 미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백업을 주기적으로 할 리가 없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목젖에서 막혔다. 나의 부족함을 후회하기엔 이미 컴퓨터 실신은 벌어졌으니 말이다. 백업 따위 하나도 하지 않은 컴퓨터지만, 참담한 심정으로 기사님께 컴퓨터를 맡기며 한 마디만 덧붙였다.

"다 고장 나도 상관없어요. D드라이브만 살려주세요."



그리고 23일, 그러니깐 컴퓨터 실신사건의 다음날 수리기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D드라이브도 인식을 못하네요. 복구해 드릴까요? 비용은 XX만원이에요."


눈물 날 정도로 너무 비싼 돈이었지만, 내가 가진 파일들을 날린다면 피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수년간 만들고 정리해 온 나의 아카이빙 자료들, 다시 만들 수도 없는 사진과 영상, 어디서 찾을 수도 없는 양질의 자료들. 그것마저 건지지 못한다면, 내 모든 데이터들을 잃는 거였다.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제발 복구해 주세요. 하나도 잃을 수 없어요."


그렇게 컴퓨터는 마지막 수술에 들어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방에 들어갈 때마다 본체 사라진 모니터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이 무더운 날 자기 전까지 구천을 떠돌다 들어오곤 했다. 이런 날 불쌍하게 여긴 혈육이 마침 본인이 최근에 본체를 바꿨으니, 오래된 거라도 괜찮으면 가져다 쓰라고 했다. 혈육이 이렇게나 고마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새 본체 구매에 쏟아부어야 할 많은 돈을 한 번에 세이브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버려지기 직전이었던 혈육의 본체를 입양하면서 내가 쓰던 원래 컴퓨터 환경으로 재구축했다. 크롬으로 로그인을 하니, 내가 쓰던 확장 프로그램, 북마크 등등 모든 걸 자동으로 세팅해줬다. 이전이었으면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바로 사용했을 텐데,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 아, 온라인이 짱이구나.


21세기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IT기기를 나는 가져본 적이 없다. 노트북도, 아이패드도, 갤럭시탭도, 스마트워치도 없는 나는 하물며 닌텐도도, 스위치도 없었다. 그러니깐, 데스크탑이랑 핸드폰 말고는 IT기기가 아예 없다. 게다가 데스크탑과 핸드폰을 연동하면 남들에게 내 자료들이 너무 쉽게 노출될 것 같아서 단 하나도 연동시키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온라인 세상의 응용은 생각도 못하고 원시인마냥 혼자 기록하고, 혼자만 가지고 있던 것이다.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백업하는 습관을 가지지 못할 거라면, 공유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자료 관리 프로세스를 만드는 사이에 컴퓨터의 수술이 끝났다. 다행히 D드라이브의 모든 파일은 복구되었다. 컴퓨터는 그렇게 내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바보라는 셀프 조롱을 가져다줬고, 21세기 문명인으로 거듭나라는 위로까지 북돋아줬다. 컴퓨터는 내가 가진 유일한 IT기기 중 하나답게 마지막까지 효자노릇을 하며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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