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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우 Aug 25. 2024

보고 싶은 외조부모님을 드디어 뵙고 왔다

너무 늦게 다녀왔다. 돌아가시고 처음이었다. 늘 외할아버지가 꿈에 나왔었다. 얼굴은 비추시지 않아도 통화를 하고 그랬다. "정우야. 잘 지내나?" 하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히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느 날은 당신께서 꿈으로 떡 사진을 보내셨다. 가기로 엄마와 일정까지 잡은 때였다. 그래서 엄마에게 부탁해 떡을 가지고 같이 뵈러 다녀왔다.


이제까지 너무 멀다는 핑계로 다녀오지 못했다. 대구광역시 군위군에 있는 가톨릭묘원이었다. 외삼촌의 아들이 나이가 너무 어려 영정 사진을 들 수가 없어 내가 두 번이나 들고 다녀온 장소였다. 오늘 가니까 너무 예쁘던데 왜 가지 못했을까. 핑계가 참 거창하다. 보고 싶은 분들. 진작에 다녀올 것을.

엄마가 기도문을 외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고인이 된 외조부모의 성함과 세례명을 이야기하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에 갑자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한 기도, 주기도문, 성모송을 외고 드디어 개별 기도의 시간.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다른 분들도 계시는데 망자를 기리고 계시니까 너무 울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외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떡 가져왔습니다. 곧 태국에 갑니다. 다녀와서 학위논문을 잘 마무리하고 박사 받을 수 있게 외손자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눈물 싹 닦고 돌아서는데 참 예쁜 묘원이었다.

참 공교롭다. 두 분이 돌아가신 때가 각각 석사와 박사를 입학하기 직전이었다. 석사 합격 발표 나기 바로 전에 외할머니 장례를 했었는데, 손자 도와주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박사 입학 바로 전에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그 힘으로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내 어릴 적을 생각하면 부모님, 이모들 다음으로 자아 형성에 참 많은 역할을 한 분들이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지나 나는 서른셋이 되고 어릴 적의 흔적은 다 사라졌다. 심지어 얼마 전에 내 동생은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언제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나에게 YES였다. 장녀에게서 보았던 큰 외손주이니 더 그랬을 것이다. 덕분에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떠나보내는 것이 나에게 쉽지 않았다. 외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한참 편찮으셨었는데, 병명을 진단받던 날 정말 집에서 밤새 울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 사주셨던 책상, 학용품 사주신다고 함께 코스트코를 갔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여덟 살의 나에겐 참 좋은 기억이었다.



이제는 어릴 적 갔던 외갓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고, 그 동네에는 기억들만 남아있다. 예전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도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손님이 어느 정도 오자, 모두들 피곤할 테니 호텔에서 쉬고 오라고 했다. 범어로터리의 어느 호텔에서 창밖을 바라보는데 얼마나 기분이 이상하던지. 어릴 적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동네를 바라보면서 한참 생각에 젖었었다.


아직도 후회되는 일화가 하나 있다. 내가 군대의 가기 전 일이었다. 과외를 해서 용돈을 벌던 시기였는데 오랜만에 대구에 갔다. 큰 이모에게 이야기해서 외할머니와 내가 좋아하는 중식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누룽지탕. 그런데 그때가 2010년인가, 2011년인가. 당시에 그 집 누룽지탕이 7만 원이었다. 누룽지탕 조그만 접시로 나오는 것이 7천 원이었는데, 그걸 두 접시 시키고 나머지 요리도 시키고 그랬다. 그때 그냥 시키지. 무슨 누룽지탕이 이렇게 비싸냐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내가 주로 먹으러 가던 곳이 비싸야 5만 원이었으니까. 


누룽지탕을 좀 덜어드리는데 드시더니, 당신께서 처음 드셔보신다며 정말 너무 맛있다고 하셨다. 그렇게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뒤에 참 후회를 했다. 7만 원이 뭐라고 그냥 누룽지탕 한 대접 샀으면 좋았을 텐데. 돈을 못 벌지도 않았으면서, 과외로 번 돈 그걸로 밥 한 끼 사드리는데 좀 더 쓰지. 스무 살의 나에게 지금도 후회가 된다. 그리고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할머니는 그렇게 편찮으셔서 오랫동안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나에게 무언가 남았나, 나는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먹는 것을 사게 되면 돈을 아끼지 않는다.


외할머니와 남양진주 공예품 보러 대백플라자 갔을 때도 기억하고, 다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참 너무 좋은 기억들이다. 외할아버지가 정원 꾸미시고 하는 모습, 계단 올라가 현관이 열리면 "아이고, 우리 정우 왔나"하시면 맞아주시던 모습. 외할아버지는 나훈아를 참 좋아하셨지, 외할머니 설거지하시다 두 분이 노래를 참 자주 부르셨다. 저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해주신 당신께 참 감사하다.


이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뒤로하고, 외손주는 만으로 서른셋이 되어 미래를 준비한다. 앞으로 내가 하는 여정, 태국에서의 연구도, 박사논문 작성에도 함께 해주시겠지. 그만큼 나도 열심히 할 테니까. 늘 생각만 하면 보고 싶고 그렇지만 지금은 뵐 수 없으니까. 특히 나의 전화를 받으실 때의 목소리가 계속 기억난다. 지금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 글을 그만 쓰고 좀 울어야겠다. 떠나간 당신이 참 보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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