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선 Jan 10. 2024

마리 이야기

자본만 좋아했던 공감능력에 대한 반성문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저는 사실 <마리 이야기 (2001)> 개봉을 반대했더랬습니다 (이성강 감독님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그런 걸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니었죠. 여전히 탄탄한 입지나 뚜렷한 비전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불러주는 곳에서 일 맡아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인생이었거든요. 단지, 업계에 있었던 한 사람으로서,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 상황을 봤을 때 이 작품의 데뷔 시기가 너무 빠르다... 정도만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던 것뿐이었어요.


사실 그래요. 1993년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 한국 콘텐츠 산업은, 특히 애니메이션 제작 품질 수준은, 사람들의 기대에 비해선 아주아주아주아주 비참할 정도로 조악했었거든요. 물론 일본과 미국 애니메이션 하청업으로 금탑 수출 산업훈장도 받고 그럴 정도로 생산력은 있었었죠. 하지만, 그게 곧바로 제작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때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은 제작역량은 뛰어나기 때문에, 훌륭한 시나리오와 기획만 있으면 세계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라는 거였어요. 개뻥입니다. 기본적으로 하청으로 일을 받았던 미국과 일본 TV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작품만 고품질의 작업 수준이 필요했었고 나머지는 그냥 커다란 얼굴에 눈 깜빡, 입 뻐금만 넣거나, 왔다 갔다 걸어 다니기만 하는 거였는데, 그걸 맡겨진 납기기한 안에 잘 해냈다고 극장용 작품의 제작역량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현실이 그랬는데도 <아마게돈>이나 <블루시걸>의 실패가 마치 애니메이션 업계 사람들이 투자/기획자들을 기만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거죠. 사실 높은 수준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이건 애니메이션이 잘 팔리는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원작자가 직접 개입해서 품질을 관리한 슬램덩크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연재종료 26년 후에나 만들어졌던 것 아니겠어요? "더 퍼스트"라는 수식어를 달고 말이죠.


물론 정부자금과 각종 지원금 및 투자금이 콘텐츠 산업에 몰리면서 이때다 싶어 등장하는 사기꾼들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혹은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부흥을 위해서 진지하게 작품 기획을 했었죠.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 외에도 김문생 감독의 <원더풀 데이즈>, 조범진 팀의 <아치와 씨팍> 등의 작품들이 1995~6년부터 희망을 품고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영화 기획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알았어요. 이 작품들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과연 국내 상영만으로 수지를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말이죠. 당시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기획서들은 대개 "One Source Multi Use"라고 해서, 극장 수익, 방송 판권, 해외 배급, 캐릭터 상품 개발 및 판매, TV판 제작, 도서 제작 등에 더 나아가서 테마파크까지 만들어 돈을 벌겠다는 달콤하지만 허황된 계획들만 잔뜩 있었지, 이전 성공 사례도, 해외 배급 및 캐릭터 머천다이징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없었어서 예상수익의 구체적인 근거는 전혀 없었거든요. 당장 극장용 애니메이션 관람시장이 과연 어느 정도 규모인지조차 아무도 몰랐어요. 그래서 원작자가 직접 품질을 감수하고 KBS 공동기획해서 여름방학 맞춰 개봉한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 (1996)>이 예상보다 수익이 나질 못하자 모두 겁을 먹기 시작했던 거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과대평가받을 때의 불안함. 처음에야 '아싸, 개이득' 이렇게 넘어가지만, 언젠가 까발려질 실체 때문에 너무너무 불안해지는 거 말이죠. 그래서 들키기 전에 하루빨리 사태를 수습하고 싶은 기분. 저 때가 딱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서 거의 다 만들어 놓은 걸 그냥 가져다 놓고 극장에 걸었던 <돌아온 영웅 홍길동 (1995)>과 <헝그리 베스트 5 (1995)>을 제외하고는, 사실 <아마게돈 (1996)> 정도가 당시에는 총력을 다했을 때 나올 수 있는 품질 수준과 흥행성적이라고 생각해야 했어요. 게다가 흥행성적이라는 건, 이게 꼭 작품의 품질에 백 퍼센트 영향을 받는 게 아니잖아요. 시장 성숙도와 마케팅 등등을 같이 고려해야 하는 데도, 마치 (기획은 괜찮았는데) 애니메이터들이 고의로 사기를 쳐서 작품이 거지같이 나왔기 때문에 영화가 망했다...라는 식으로 희망회로를 돌리기도 했었죠. 그래서인지 IMF 직전의 다른 산업들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돈줄은 마르지 않았었으니 아무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죠. 우린 그냥 좆밥이라는 걸. 일단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제작능력도 키우고 시장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근데 왜 그러겠어요. 그냥 힘숨찐 코스프레만 하고 있어도 여기저기서 돈이 들어오는데.


IMF가 지나가고 문화콘텐츠 지원심사 채널이 일원화되고부터는, 그나마 사람들이 현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천국의 신화>로 극장판 애니메이션에 재도전하려고 했었던 이현세 작가는 2002년에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가 지각개봉했을 당시 극장 흥행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프로젝트를 접었다는 얘기도 있었고 말이죠. 그래서 당시 젊은 애니메이션 PD들의 관심은 하루속히 수익사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TV물이든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든 상관없이 말이죠. 극장판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정해진 상영기간 내에 극장수익이 잡히니까 좀 더 뚜렷한 수익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제작 역량을 갖추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문제가 있었고, TV물은 (적게나마) 방송국에서 제작비를 일부 받을 수 있고, 시장에 노출이 훨씬 많기 때문에 캐릭터 머천다이징을 하기 좋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방송국과 판권 정리하는 부문에서 다른 투자를 받는 것이 어려웠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리 이야기>의 제작 얘기를 들었던 거죠. 뭐랄까... <덤불 속의 재> 때부터 이성강 감독님 팬이긴 했는데, 국내 극장 흥행이 하나도 기대가 안 되는 작품을 과연 이 시점에 극장에 걸어야 하는 건가... 하는 걱정이 있었던 거죠. 과대평가가 되었든, 눈먼 돈이 되었든 간에, 이렇게 돈줄이 아직 안 말랐을 때 제대로 된 수익 모델이 먼저 나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물론 지금 시점에서 돌아본다면, 이 작품을 극장에 걸었던 경험이 이후 <천년여우 여우비(2006)>이나 <마당을 나온 암탉 (2011)>이 극장에 걸릴 때 많은 도움을 줬을 거라는 건 부정하지 못하지만요. 그래도 그땐 진심으로 걱정되었었다구요. 그리고 이런 걱정들은 비단 <마리 이야기> 뿐만 아니라 <아치와 씨팍>, <원더풀 데이즈>가 극장에 걸릴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적어도 나중에 <뽀롱뽀롱 뽀로로>가 '대박'을 터뜨려 한국의 애니메이션 회사 중에 자생력을 갖춘 곳이 나왔을 때까지는 말이죠.






'대박'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95년도에 한국 애니메이션 생존전략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썼을 때였어요. 그때 '대박'이라는 용어를 보고서에 넣었는데, 그걸 읽었던 다수의 사람들이 '대박'이라는 업계 은어를 공식 연구 보고서에 쓰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얘길 하더군요. 이제는 뭐, 노랫가사에도, 감탄사로도, 한류 유행어로도, 대통령 담화에까지 쓰이는 말이 되었으니 저런 걱정을 했다는 사실이 아름다운 추억의 하나로만 남지만요. 하지만, '대박'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렇게까지 대중화되었다는 건 좀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전 국민의 열망이 경제적인 수익에 맞춰져 있어서 그런 걸 테니까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가끔은, 한국의 모든 영화 관객의 반응이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경도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해요. 사실 투자자들이나 한 작품의 시장 흥행 성패가 자신의 작품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야 하는 업계 사람들은, 뭐,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일반 관객까지도 어떤 작품의 작품성보다 손익분기점 도달여부에 먼저 관심을 갖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거죠. 코로나 이후 텐트폴 영화들이 주루루 흥행 실패를 했을 때에도 언론에서는 마치 국가 부도를 낸 죄인들처럼 취급하기도 했구요.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연명하는 엔터테인먼트 업계라는 곳이 원래 이것저것 눈치를 봐야 할 일이 많기는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중예술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유독 빡센 것 같기도 해요. 타인에게 모범이 될만한 도덕성을 갖추기도 해야 하고 동시에 돈도 잘 벌어야 한다니 말이에요. 모두 다 플렉스를 외치는 시대에서도 영화는 꼭 수지를 맞추는 것이 미덕이라니, 좀 억울하기도 한 것 같고, 너무 투자자 입장에서만 영화를 감상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그냥 일반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를 볼 때, 재미가 있다, 감동이 있다, 생각할 여지가 많다 정도로만 판단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돈(관람료) 값을 한다, 못 한다”로 또 환원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거기까지만. 롯데에서 배급했든, CJ에서 배급했든, 과연 그 영화가 손익분기를 맞췄는지 아닌지는 굳이 나까지 케어해줘야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거든요.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덧 :


<외계+인, 2부>의 개봉을 축하합니다. 캐나다에서도 얼렁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운 작품 <마리 이야기>의 극장 재개봉도 기원합니다. 가능하면 돌비 애트모스로 리마스터링해서요 ㅎㅎ.

매거진의 이전글 (It's) Not a Big Deal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