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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Jul 05. 2024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법치주의와 사회적 정신건강

먼저 오래된 밴쿠버 농담 중 하나.


풀장에 들어가 있는 밴쿠버 사람 20명을 단 한 번에 나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


그냥 "나오시오"라고 말하는 거야.






이 농담을 벌써 20년도 전에 밴쿠버 경찰 친구한테 들었어. 경찰들도 밴쿠버 사람들이 규칙을 잘 지키고 말 잘 듣는 걸 알았나 보지. 사실 세계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도 무척 친절하고, 배려 돋는 건 있다고 생각해. 공권력의 권위 역시 잘 인정하는 편이고, 근데... 규칙을 잘 지킨다... 는 건 잘 모르겠어. 20년 전에도 지금도. 아마 법과 규칙이 너무나 많았던 한국에서 살던 경험이 아직 몸에 남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멀리 가지 않더라도 절도와 같은 경범죄 비율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 여기가 말도 못하게 높거든. 한국에 갔을 때, 카페에서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그냥 두고 커피를 받으러 가는 걸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니까. 그런 문화가 어떤 연유로 정착이 되었든 간에 타인의 물건을 쉽게 훔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경이로운 일이긴 하잖아.  밴쿠버는? 아마 10초 컷일걸?


한국에서 성장기를 보내는 동안 수많은 규칙과 규율 속에 나 자신을 길들여 오긴 했지.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칠판 옆에는 '하면 된다'와 같은 급훈이 붙어 있었고 말이야. '4당5락'이라고 해서 수험생들은 수면시간까지 규칙을 만들었었지. 무슨 의문이라도 품을 양이면 어른들이 종종 이렇게 입을 막고는 했잖아. "원래,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하긴 이런 규칙과 규율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의 기적과도 같은 경제 성장은 없었을지도 몰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가며 이룩해 낸 결과니까. 실제로 이렇게 사회규범이 강력하고 구체적인 나라일수록 빨리 부강해지는 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역사적으로 증명된 일이었잖아. 로마의 군대가 그랬고,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를 끝내면서 중국 최초 통일국가를 세운 진나라도 그랬어. 백가쟁명으로 대표되는 춘추시대의 수많은 철학 중에서 진나라는 과감하게 '법을 통해 사회가 유지되는" 철학을 받아들였거든. 기존 귀족들의 기득권을 무시하고 신분으로 혜택이 주어지는 관행을 깨뜨리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가사상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 이게 과연 좋은 방식인지. 그때는 진나라가 나머지 여섯 나라를 멸망하게 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만들어줬다고 해도, 인터넷과 Ai 기술이 생활에 들어온 지금 이 시대에도 어울리는지. 아니, 당장 그 통일 진나라 시대로 거슬러 가더라도 과연 그게 진정 사회가 평화롭게 돌아가는데 도움을 줬을지. 그 때나 지금이나 규칙의 핵심은 "무엇은 어떻게 해야 한다"하는 사회적 약속이거든. 그리고 그걸 어길 경우의 처벌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고 말야. 운전할 때 도로에서 중앙선 침범을 금지해야 하고 이를 어길 경우 벌금 및 벌점이 붙는 것처럼. 다시 말해서 규칙, 규율이라고 칭해지는 사회적 합의가 준수되는 과정은 개인의 선한 의지보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더 강하게 의존한다는 거야. 그것도 피해자의 복수가 아닌 법에 의한 처벌. 국가 시스템에 의한 처벌. 그러니 규칙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당연해. 통일 진나라가 수많은 민중 봉기로 멸망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 지도 몰라. 그리고 이후 등장한 한나라의 시조 유방이 약법삼장이라는 간단한 법률로 사람들의 인기를 얻게 된 것도 그만큼 당연한 일이고.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규칙을 좋아하게 된 걸까? 질서 있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선호? 그럴지도 모르지. 혼탁한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길라잡이 역할? 그것도 맞는 말일지도.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들자면 법에 대한 흔한 오해 - 기득권자의 폭력으로부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착각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다시 말하자면, 내가 타인과 싸우는 데 있어서 힘이 약한 나 대신 상대를 혼내주는, 법에 의한 적의 응징을 통해서 사이다를 느끼는 걸 좋아해서 그렇다는 거지.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평등하지 않다는 건 누구나 다 알잖아. 질서를 지키고 규칙을 지키는 사람만 손해 본다는 얘기는 우리 세대 이전부터 있었고. 그런데 적어도 법 앞에서는 상대방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싶은 거야.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항상 당하고 살았던 기억. 법과 규칙을 활용해서 그걸 극복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는 거지. '교화'나 '사회적 격리' 등 규칙을 어길 때 행해지는 처벌의 기능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우리가 가장 기대하는 법의 기능은 '응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밴쿠버로 처음 이민 와서 가장 답답했던 것 역시 규칙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아. 아니, 그보다 여긴 규칙이라는 게 별로 없어. 오히려 상황에 따른 개개인의 재량을 더 존중하는 편이지. 외식문화에서 팁을 주는 것도 그렇고, 소매업이나 식당 점원 개개인도 자신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거든. 엊그제는 휴대폰 통신사를 바꾸러 갔었는데, 얘기가 잘 통하는 점원과 즐겁게 일을 진행하고 나니까 나한테 100불 상품권을 주더라고. 나 역시 소매업에서 일하는 동안에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손님들에게 금전적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거든 (그러니까 종업원들에게 항상 친절합시다).


암튼, 처음에는 이렇다 할 규칙을 잘 모르다 보니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했었지. 인종차별이 사회적 금기라고는 알았지만 그게 어느 선부터가 금지인지, 신규 이민자가 흔히 듣게 되는 "여기선 그러는 거 아냐"와 같은 훈계도 인종차별적 제스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런 가이드라인이 전혀 없어서 너무 답답했던 것 같아. 단 한 권의 책 속에 이래라저래라 하고 쓰여있었다면 그걸 며칠에 걸쳐 습득한 후, 누가 뭐라 그랬을 때 "아니거덩!" 하며 으르렁댈 수 있었을 텐데, 눈에 보이는 규칙이 없다 보니 더 답답했던 것 같다는 거지. 그때 역시, 아주 세세한 규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갈망했었어. 신규 이민자라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하지만, 이게 법을 통해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실은 그냥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갈망했던 게 아니었을까? 문제는 여기 있었던 거야. 사회 규범이라는 것이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사용되다 보니까, 오히려 더 큰 사회갈등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는 거야.


예를 들어, 밴쿠버의 커머셜-브로드웨이 전철역은 예전부터 통행량이 장난 아니게 많기로 유명한 환승역인데, 최근에 에스컬레이터 공사를 하면서 더 복잡해졌거든. 그러다 보니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 하나를 일방통행으로 정해버렸더라구. 올라가는 전용으로.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이었겠지. 근데 급한 출퇴근 시간이 되면 아무래도 반대로 내려오는 사람이 한둘 생기기도 하는데, 이것 때문에 계단 한가운데에서 쌈질이 일어나는 것도 종종 보이더라구. 여기도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나서서 질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하루아침에 새로 생긴 규칙이라도. 심지어 규칙으로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바쁘게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을 위해 에스컬레이터 왼쪽 편을 비어두는 관행을 따르지 않는 것조차 분쟁의 원인이 되잖아. 이쯤 되면 과연 저 규칙이 안전에 도움을 주는 걸까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아무래도 사람이라는 게, 난데없이 지적을 받고 나면 자신의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예전에 코로나 때처럼 새로운 규칙이 매일매일 만들어졌을 때는 더욱 심각했었지. 그건 배려 돋는 도시로 유명한 밴쿠버에서도 마찬가지였어. 우리가 언제부터 마스크 쓰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다고, 마스크를 안 쓰면 마치 잠재적 살인자처럼 몰아붙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심한 천식이 있어서 마스크를 코와 입에 같이 쓰면 호흡이 무척 곤란했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집에만 있어야 하기도 했어. 백신도 마찬가지. 아는 동료 하나는 아이를 가지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서둘러 만들어진 백신의 부작용이 의심되어 접종을 거부했었지. 결국에는 회사를 그만둬야 했어. 우리 회사는 연방정부 계약이 있어서 연방정부의 백신정책을 따라야 했었거든. 이런 상황에서, 마스크를 못 써서 외출을 못하고 백신을 안 맞아서 회사에서 잘린 상황에서, 이들이 사회에 대한 분노를 안 가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 아닌가 싶어.  마스크 의무화와 백신 의무화를 주장하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정의구현이라 생각이 들겠지만, 바로 어제까지 법 잘 지키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던 이웃이 순식간에 범법자가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난데없이 질타를 받았던 이들도 자기 방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자유의 숭고함을 주장하면서. 캐나다에서도 백신 음모론을 주장하던 '자유의 트럭 행진 (Freedom Convoy)' 시위가 있었고, 미국이야 뭐, 트럼프가 낙선되자마자 총기를 들고 의회를 장악하려던 사건도 있었으니.


맞아. 나도 알아. 저 당시는 정말 급박한 상황이었고, 인류의 멸망이 쉽게 예견되던 시대였으니 좀 예외적인 경우일지도 몰라. 하지만,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고, 약간의 예외를 두면서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은 들어. 사실 공권력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런 규칙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통제를 좀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겠지만, 그 규칙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 마저 (어쩌면 특별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는) 규칙을 안 지키는 사람들과 대립하고 승리하려고 하는 모습이 전 사회적으로 정신 건강을 해치는 걸로 보이거든. 요즘 살면서 사회적 갈등을 예전보다 더 많이 느끼고 있다면, 어쩌면 그만큼 이 사회의 규칙이나 규범이 더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행동을 규정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이런 건 비단 규칙이나 규율뿐 아니라, 어떤 새로운 문화가 그 사회에서 상식이나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는 과정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아. 인종차별, 성차별, 환경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 수준이 예전에 비해 훨씬 높아진 것까진 좋은데 왜 사는 게 점점 더 피곤해지는 걸까? 이 높아진 의식 수준이 타인을 질타하는 것에만 활용되고 있는 느낌이랄까?


몇 주 전에는 환경운동을 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여름휴가 계획을 나누던 중에 그 친구가 캘거리까지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이라는 얘길 들었지. 열 시간 정도 되는 버스 여행. 비행기를 타고 가지 그러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비행기가 만드는 탄소 배출에 대해서 또 얘길 들어야 했어. 물론 그 친구가 우릴 가르치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바로 몇 주 전에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갔다 온 아내가 빈정 상하기엔 충분했었나봐. 당장 그럴 거면 자전거를 타고 가지 그러냐..라는 얘기가 나왔지 뭐야. 뭐, 이 친구의 진심을 우리가 몰랐던 것도 아니고, 워낙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니까 그냥 웃으며 장난을 쳤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전파하는 과정에서 질타나 모욕이 횡행하기도 하잖아. 뭐, 사실, 80~90년대, 절차적 민주주의와 시민의 자유를 얻어나갔던 우리도 마찬가지였지. 사회 속 권위주의가 조금씩 해체되면서 예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등장했었잖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사회구성원들에게 제공되어야 할 보편적 복지. 학문과 사상, 표현의 자유와 같은 것 말야. 지금은 뭐,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들이 되었지만,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서 무척 많은 사회적 갈등이 있기도 했었어. 당시에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당연한 일이 어른들로부터, 기득권자들로부터 부정당하는 걸 보고, 우리 역시 그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 생각이 아니라 그 사람들 자체를) 구시대적이라고, 반동이라고 적대하곤 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우리의 적대감을 눈치챈 노인네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방어를 하게 되었고 말이야.


그렇게 권위주의가 싫어서 저항했던 것이었으면서도 나와 다른 생각을 폭력적으로 부정하고, 나아가 무식하면 공부를 하라는 식으로 멸시를 주기 십상이었어.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너무나 만연한 일이었지. 이런 걸 볼 때마다, 예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나. 경찰과 미군정의 추적을 피해 제주로 도망간 대치와 여옥은 또 4.3 사건에 휘말리게 되잖아. 그때 대치와 함께 서울에서 공작 활동을 했던 서강천이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학살극에 저항하려는 제주도 민간 무장대에 합류하게 돼. 그런데, 단지 살기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제주 사람들 입장에서는 남로당원이 끼어드는 게 반가울 리가 없잖아. 그랬더니 서강천은 수많은 어려운 용어를 써가면서 훈계를 하다가 이렇게 얘기를 해. "아, 이거, 동무들, 학습 좀 해야겠습니다, 이거!" 우리가 딱 이 꼴이었던 거야. 왜 그렇게 '공부', '학습'이라는 좋은 단어들을 듣기 싫게 만들었었는지 몰라.


캐나다 밴쿠버에서 사는 소수 인종, 1세대 이민자, 비영어권자로서,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PC)'의 혜택을 안 받았다고 말할 순 없겠지. 그나마 이런 새로운 사회적 합의 때문에 그나마 내 눈앞에서 (내 뒤에선 모르지만) 무도한 자들이 덜 설치게, 말을 좀 더 조심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말야. 그래도 나는 이 사회가 점점 더 경직되어 가는 게 못 마땅해. 그 수많은 좋은 이념들, 좋은 이론들, 좋은 단어들이 타인을 비난하는 근거로만 사용되는 것이 너무 못 마땅해. 말꼬투리 하나 잡혀서 또 물어 뜯길가 걱정하는 세상이 불안해. PC로 인해 새로 만들어진 수많은 터부들이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건 맞겠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편에서는 PC라고 하면 질색하는 이유는 뭐겠어? 자신이 범죄자 취급을 받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 바로 어제 만들어진 마스크 의무화 때문에 집에 갇혀 있어야 했던 천식환자처럼. 불의가 들끓던 대결의 시대를 살았던 예수와 공자도 결국 사랑과 인(仁)을 설파했었잖아.


자기 스스로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을 가지고 창작의 표현이나 일상 생활 속 대화에서도 좀 더 조심해가는 건 좋더라도, 그걸 타인에게 적용할 때는 조금은 더 유연했으면 좋겠어. 매일매일 정세가 급변하던 코로나 시때, 걱정과 증오가 넘쳐났던 당시 BC주 보건을 책임졌던 닥터 헨리의 말처럼 말이야.




지금은 우리가 친절함을 잃지 않고, 침착함을 잃지 않고, 안전하게 지낼 때입니다. (This is our time to be kind, to be calm, and to be safe)

- Dr. Bonnie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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