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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Nov 26. 2024

친절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친절해주세요

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에서 못다 한 이야기 #1

밴쿠버 다운타운에 있는 고층 건물 설비를 관리하는 입장에서 노숙자들과 친해지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겨울철 우기가 시작되면 더 그렇죠. 기본적으로 밴쿠버 노숙자 보호시설이 모두를 수용할 만큼 충분하지도 않고, 또 나름 규율이 있는 곳이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은 그곳을 피해 종종 아무 건물이나 들어오거든요. 그리고 무단 침입을 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기초적인 배설활동도 장소를 딱히 가리지 않죠. 그냥 잠자리에서 멀리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라면 이곳저곳 가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애용하는 마약이라 게 깔끔하게 한 알 삼키고 마는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사기는 물론 은박지에 깔아 둔 후 토치로 가열해 증류시켜 마시는 것도 있어서 화재의 위험성도 있거든요 (물론 실재 불이 안 나더라도 스프링클러가 터지거나 화재경보기만 울리고 마는 것도 충분히 골치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경비업무가 제 일은 아니더라도 건물 경비실과 협력해서 순찰할 때마다 노숙자를 발견하면 밖으로 내보내고는 합니다. 저항도 만만치 않아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고 (그게 뭔지는 끝까지 확인을 못했습니다), 코로나가 한참일 때는 침 뱉는 건 번번이 일어나는 일이었죠. 그래서 촉이 쌔하게 올 때는 거리를 두고 경고만 주다가 결국 경찰을 부르는 일이 많아요. 노숙자들 상대로 각 잡고 용쟁호투 찍기도 좀 그렇잖아요.


하루는 건물 로비 안에서 노숙자가 자고 있었나 봅니다. 건물 경비 주임 할아버지가 발견하고 나가라 그랬겠죠. 캐나다 고속도로 기동순찰대 출신답게 카리스마 쩔거든요. 근데 그 장면이 저희 건물에서 일을 하는 연방 공무원 한 명의 심기를 건드렸나 봐요. 뜯어말리면서 노숙자에게 함부로 굴지 말라고 항의했다죠. 그러고 나선 로비에 있는 식당에서 따뜻한 스무디를 한 잔 사서 노숙자에게 건네었대요. 건물 로비는 공고장소니까 원하는 만큼 쉬었다 가도 좋다 그러면서. 근데, 그 노숙자가 따뜻한 친절이 가득한 스무디를 받자마자 경비 주임 할아버지한테 냅다 던졌답니다. 놀란 라이언의 강속구로.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두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노숙자는 유리문을 발로 뻥 차고 나가버렸고 로비 카운터와 바닥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무디만 남았습니다. 한순간이나마 자신의 친절에 만족해 있었던 연방 공무원이 그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방송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영화 <와일드 로봇>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친절이 생존기술 (kindness is survival skill)”이라는 걸 혹한기 속에서 증명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근데 모든 고귀한 말씀이 그렇듯이 실생활에 적용을 할 때에는 약간의 트위스트가 있잖아요. 뭐, 영화에서도 친절해지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하지는 않죠. 심지어 자기 본성을 극복하는 일 (Sometimes, to survive, we must become more than we were programmed to be)이라고까지 했으니까. 특히 이렇게 남의 친절을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내가 먼저 친절해지는 건 적잖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영화에서처럼 최고포식자가 먼저 친절을 선언 - 현실 세상에서 미국 대통령이 먼저 남에게 친절하자고 선언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남에게 친절해지는 순간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는 피라미드 맨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적당한 친절 행사가 발생시키는 손해를 감내할 수 있는 여력이 큰 사람들보다 먼저 친절해지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자신보다 (자기 기준으로 봤을 때) 아래로만 흐르는 친절이란, 사실 동정과 구별하기 무척 힘들죠. 뭐 동정이 나쁜 거라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보다, 저에게 있어서 친절해지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책임감입니다. 굳이 여우와 어린 왕자와 장미의 에피소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친절해지는 순간 그 친절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마저 감내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앞서 언급했던 저 에피소드에서, 경비 할아버지가 난데없이 핫 스무디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 노숙자에게 친절했던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예측하지 못하는 사고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굳이 잘잘못을 가리자면 멀쩡한 사람에게 뜨거운 음료수를 던진 사람에게 있겠죠. 하지만, 자신의 친절에 연관된 사고가 발생한다면, 과연 그 마무리에 대한 책임까지 친절한 사람이 져야 하는가, 혹은 반대로 그에게 책임이 없는가에 대한 의문은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지금 저희 빌딩에 생쥐가 나타나서 난리인데요.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여기저기 방치해 두는 경우가 많거든요. 암튼 쥐를 발견하면 경악을 하면서 응급콜을 만들기도 하는데, 막상 쥐약을 놓으려면 죽이지 말라고 또 그러거든요. 생쥐가 건물 안에 있는 건 혐오하지만 또 그걸 죽이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상황인 거죠. 왜, 영화 <애니홀>을 보면, 어느 날 엘비 (우디 알렌)에게 애니 (다이엔 키튼)가 새벽 3시에 전화를 하잖아요. 헤어진 지 한참 지났는데도. 그러면서 화장실에 거대한 거미가 나타났으니 그걸 좀 잡아달라고 해요. 다시 말하지만, 헤어진 지 한참 지났는데도 말이죠. 잡지와 테니스 채를 동원한 사투를 벌인 끝에 거미를 변기 속으로 흘려보내고 나왔더니 쭈그려 앉아 흐느끼는 애니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앨비가 한 마디 하죠. "어쩌라고? 그 놈들을 생포한 후 잘 교화시키기를 바랐던 거야?"


친절하기 힘든 또 다른 경우에는, 아무래도 고객 서비스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많이 느끼시는 경우일 텐데, 한 팀 멤버 중 꼭 유독 손님이나 클라이언트에게 친절한 사람들이 있죠. 심지어는 자신의 점심시간까지 버려가면서 돕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전에 컴퓨터 매장에서 수리 기사로 일을 할 때에는, 제가 고장 수리 서비스를 하는 시간은 하나의 상품으로 판매가 되는 거라서, 제 임의로 무료 서비스를 하거나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직원에게 특별한 서비스 - 간단한 고장 수리 같은 것 - 를 받은 손님들이 저에게도 같은 서비스를 (무료로)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게 상품이라고 설명을 해도 화를 내기 일쑤였죠. 물론, 남들에 비해 친절했던 그 직원의 잘못은 아닙니다. 타인의 친절을 자신의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거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직원의 친절이 팀 전체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반대로, 또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손님들에게 친절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이밖에도 우리가 친절해지기 힘든 사례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특히,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 친절로 인해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더 꺼려지게 되죠. 친절한 누군가가 있고, 그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누군가만 있다면 애저녁에 세상이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힘든 사람들이 더 많아질수록, 내 친절이 누군가에게 더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줄수록, 이 세상에서 친절이 버티기는 힘들어집니다. 그걸 그대로 반영하듯이, 현재 전 세계에서는 (이민자, 성소수자, 이성, 연령층 등) 타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들이 더 지지를 받고, 결국 정권을 가져가는 일들이 많아졌어요.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그런데 이 사람들과 남에게 친절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같이 얘기를 해 볼 생각 없이 마냥 비난만 해댄다면, 친절하지 못한 사람들 역시 자신의 논리를 더욱더 공고하게 방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친절한 사람들을 무책임한 철부지 정도로 매도하면서 말이죠. 결국 친절한 세상을 만들려다가 더욱더 양극화된 세상을 만들게 되는 셈이죠. 그렇더라도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까 봐 무서워서 물에 빠진 사람을 못 건지는 세상이 되는 건 너무 참혹하잖아요.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만족감 이상의 더 큰 혜택으로 돌아오는 세상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친절이 치명적인 피해가 되지 않도록 법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가장 선결과제일 겁니다. 물론 견디기 힘들 정도로 오래 걸리는 일이기도 하죠.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그들에게 대학입학이나 고용에 있어서 쿼터를 주는 제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규모가 커지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이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다시 말해 소수자들 쿼터 때문에 내 능력이나 내가 쌓아온 노력이 무시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애초 취지와는 정 반대로 비난의 화살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향해지는 상황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제로섬 게임의 세상에서, 여전히 남에게 친절하기 위해서는 어떤 결과까지 책임져야 하는 걸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그냥 비교적 형편이 나은 사람들의 배려만을 요구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요? 지난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 팟캐스트 1회 방송에서, 이연 작가님은 친절한 종만이 멸종을 피해온 역사를 인용하셨는데, 당장 내가 나 자신과 내 가족의 최소 존엄성조차 지키기 힘든 세상에서 호모 사피엔스 종의 운명까지 걱정하라는 요구는 아무래도 무리겠죠.  


다시 영화 <와일드 로봇>으로 돌아간다면, 저 역시 '친절이 생존기술'이라는 명제를 믿습니다. 인류의 미래까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내가 사는 사회가 좀 덜 각박해지고 내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한 번쯤 눈 감고 넘어가기를 바랍니다. 판관 포청천이 등장해서 나쁜 놈들을 죄다 개작두로 잘라버렸으면 좋겠다는 욕망도 있지만, 그런 강력한 법의 규제가 과연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는 거죠. 그냥 내 속만 시원해지는 게 아닐까. 결국 저에게 친절해지기 어려운 이유는 그거예요. 내 친절의 결과를 내가 끝까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녹이 슨 다리를 끌고 눈보라를 헤치며 섬의 동물들을 다 끌고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내 의중을 다른 동물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해 줄 수 있는 여우 핑크에게 의지를 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불곰 토른이 앞장서서 동참하지 않았다면 과연 로즈의 친절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 것인가? 이건 반대로 말하자면, 내 친절의 결과를 타인과의 연대없이 나만의 힘으로 오롯이 감당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되겠네요. 나와 전혀 동 떨어진 타인에게 친절하기 위해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친절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친절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유난히 친절한 사람에게도 비난을 멈춰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노숙자에게, 생쥐에게, 그리고 화장실을 점거한 거대한 거미에게 친절할 수 있다면, 노숙자를 내보내려는 경비 할아버지에게도, 쥐약을 놓으려는 시설 관리 기사에게도, 새벽 세시에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전 남친에게도 친절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친절하지 못한 것은 그냥 불친절일 뿐이지만, 남에게 친절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잖아요.






...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녹음 시간이 다 되어 그만.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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