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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스피아 Aug 26. 2021

창조자들은 반드시 고독해야 한다

예술가, 작가들의 고독



코로나로 인해 '고독'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영국의 '고독부(部)' 설립에 이어 최근 일본도 고립, 고독 대책 담당실을 마련해 국가 차원의 대응에 나선다고 합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고독이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보건복지부의 올해 1분기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2030의 우울 위험군 비율은 30%를 넘어섰습니다. 

팬데믹 시대에 고독은 '정신적 재난'으로 여겨집니다. 가족 관계 외에 회사, 학교, 동호회, 지인과의 느슨하지만 소중한 관계들이 희미해집니다. 만나려는 욕망을 짓누르고 터져나오는 일의 반복 끝에 1차, 2차...n차 대유행이 이어집니다. 이런 일련의 모습을 보며 최성환 중앙대 철학과 교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좋은 세상이 다시 올 거라는 기대를 접는 것 그리고 병과 더불어, 불편과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태도 변경이 중요하다"


하지만 코로나의 '완벽한 정복'이란 가능한 것일까요? 그리고 고독은 꼭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최근 해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코로나와 함께 살아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링크) 바이러스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상정하지 않고, 이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고독에 역시 비슷한 접근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고독을 무조건 재난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박탈감을 깊게 만들고 '코로나 블루'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고독에 대한 고찰들을 지팡이 삼아 코로나 시대의 홀로 삶-홀로 섬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합니다.  





고독을 좋아하는 별종들?



고독하면 어떤 단어들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일반적으로 우울감, 심심함, 따분함 등 부정적인 단어들이 먼저 떠오르실텐데요. 행복을 위해서라면 고독은 반드시 몰아내야 하는 그림자같이 느껴지곤 합니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인, 사상가 세네카는 "가끔은 자기 자신 속으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며 일찍이 고독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독과 교제는 서로 혼합되고 교체되어야 하네. 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교제는 우리 자신을 그리워하게 만드네. 이것들은 서로 치료제가 되어준다네. 군중에 대한 증오심은 고독이 치유해주고, 고독에 대한 염증은 군중이 치유해주니까 말일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세네카는 그의 에세이들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제대로 시간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을 값지게 쓰기 위해선 철학, 즉 고독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죠.  18세기 영국의 문학가 토마스 드 퀸시 역시"자신의 인생을 고독으로 다채롭게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지성이라는 능력도 펼쳐보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성과 고독의 상관 관계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특히 소설가, 시인 등 창조적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 가운데 고독 예찬론을 펼쳐온 이들이 많은데요. 미국 작가 메이 사튼이 <혼자 산다는 것>에서 고독에 대해 했던 한 마디를 들여다보겠습니다. (국내에 최승자 시인의 번역본이 나와있습니다.)


몇주만인가. 겨우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진짜 생활'이 또 시작된다. 기묘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이미 일어난 일의 의미를 찾고 발견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않는 한, 친구 뿐만이 아니라 정열을 걸고 사랑하는 애인조차도 진짜 생활이 아니다.

-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Edward Hopper, Office at Night, oil on canvas, 56.4 x 63.8 cm, 1940.


저서 <고독의 위로>에서 저명한 철학자,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고독이 갖는 창조적 힘을 역설한 정신분석학자 앤서니 스토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외부의 현실에 지나치게 순종하면서 자신의 내면 세계를 억압하는 사람도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외부 세계를 자신이 주체적으로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닌 오직 적응해야 하는 곳으로만 여긴다면, 그의 개인성은 사라지며 삶은 무의미해지고 무익해진다.

-앤서니 스토, <고독의 위로>





내 안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기



물론 대부분의 삶을 고독한 창조의 시간으로 보내야 하는 예술가들과 일반인들의 삶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에게도 고독한 시간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유동하는-액체 근대'라는 개념을 도입해 후기 근대 사회를 분석한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고독을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와 사실들이 고정된 가치에 붙박히지 않고 흔들리는 사회에서 고독이야말로 자신을 잃지 않고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자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고독은 꼭 소수의 '유별난' 예술가들만이 아니라 SNS와 각종 쏟아지는 정보, 관계들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가치입니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일상의 사회학자'라고도 불렸던 지그문트 바우만



인문교양 분야의 대중강연자, 학자인 사이토 다카시 교수 역시 고독이 갖는 힘을 역설해온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그는"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고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기대를 갖고 단련하는 '자기력(自期力)'을 갖기 위해 고독의 훈련을 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저서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중 일부를 발췌해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에 습관처럼 도전을 해온 사람들이다. 기본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스스로를 단련하는 시간이나 에너지를 기술로 전환하는 시간으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고독한 시기에 자신을 단련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필요하면 언제든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 
혼자 있는 시간을 이용하여 혼자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세계를 즐길 수 있다면 40~60대가 되어서도 충실한 날을 보낼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즐겁고, 혼자가 되어도 만족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정도 젊을 때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습관, 즉 고독의 기술을 익혀둬야 가능한 일이다.

-사이토 다카시, <혼자 있는 시간의 힘>


고독이 꼭 외부와의 단절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홀로 있으면서도 제대로 고독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 반면, 군중 속에서도 자신만의 고독을 지켜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이토 다카시는 같은 책의 에필로그에서 고독과 외부 세계와의 균형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평소 생활 속에서 고독을 받아들이는 연습은 가능하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완전히 차단하지 말고, 소통 가운데서 고독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고독을 피하지 말고, 자신은 물론 상대 역시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고독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사이토 다카시, <혼자 있는 시간의 힘>



문은 안과 바깥으로 열립니다. 누군가는 안의 세계에 더 흥미가 있을 수 있고, 누군가는 바깥의 세계에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간극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자신과 마주한 이들은 끝에 가선 서로 만난다는 점일 것입니다.



"현자는 자기 집을 벗어나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무지개 아래에서 황금 냄비를 찾는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필연적으로 서로 만나 하나로 합쳐지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들이 만나는 지점은 길이 시작되고 만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헨리 밀러, <The Colossus of Maroussi>



Alberto Giacometti, L’Homme qui marche I, Bronze, 180.5 x 27 x 97 cm, 1961.




공존능력이라고도 번역되는 'Oikeiosi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타인의 관심을 자신의 관심으로 여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다만 고독은 때로 관계에서 얻을 수 없는 더 큰 자기만의 세계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물론 고독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모두에게 동일한 문제가 아닙니다. 고독이 실질적으로 목숨에 위협이 되는 이들에 대한 우려를 우리는 결코 놓지 말아야 합니다. 삶에 위협이 되는 고립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큰 돌덩이를 치우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발 밑의 작은 돌무덤들을 바라보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 삶은 대체로 이런 작은 행위로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고독이 반드시 피해야만 할 무언가로 치부되는 현재, 다소 새삼스러울 수 있지만 성찰의 기회로서 고독의 가치를 떠올려본 이유입니다.


오늘도 마스크를 끼고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먼 곳에서 여러분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각자 나름의 생산적인 고독을 만끽하길, 그리고 나중에 광장이 열릴 날 웃으면서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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