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곤잘레스 파파 Jul 20. 2022

83년 돼지띠 (1)

"이해찬 1세대"라 불리던 자기연민세대

기억은 사실과 다르게 저장된다.

나빴던 기억은 추억이란 단어로 아름답게 포장되고,

좋았던 기억은 꿈꿔오던 환상처럼

거품이 되어 날아오른다.


더 늦으면 더 왜곡될까 두려워 

아직은 생생하게 남아있

83년생 나의 편린들을 잘 풀어볼까 한다. 




태어났을 때는 몰랐는데,

내가 태어난 해는 전두환 정부의 시대였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조금은 아는 나이가 되니

5.18은 물론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만,

권력의 총탄에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됐고,

전근대적인 삼청교육대가 버젓이 존재했던 시절.

안기부와 경찰권의 힘이 막강했기에

이웃집에 파출소에서 일하는 친구 아빠만 있어도

듬직했던 살아있는 야만의 시대였다.


버스나 기차에도 재털이가 있었고,

연소자 관람가 영화관에도 흡연이 가능했다.

술 마시고 운전해도 경찰신분증 하나만 있으면

음주단속에 프리패스였다.


전라도의 한 소도시에 살면서 겪었던

지역적 풍토는 늘 서울에 대한 왜곡된 환상과

소외받고 배척받는 호남 출신에 대한 자기연민.

소도시 학교를 통틀어 채 10명도

서울대학교에 보내기 힘들었던

교육의 '교'자도 제대로 이뤄질 리 없는 촌이었기에

은근히 이 지역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출신적 한계도 존재했다.


특히나 당시,

호남 출신이란 꼬리표는 그랬다.


이해찬 1세대


83년생인 나는 이해찬 1세대였다.

수능보다 '특기와 적성' 하나만 잘해도 대학 갈 수 있다고

수시 위주의 재능 위주 선발을 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혔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어떤 선생님은 관악기 불 줄 만 알아도

서울로 대학 가는 데 무리는 없다며

관악부 입단을 권유하기도 했다.


나름 감성 넘치는 시나 에세이 쓰길 좋아했던 사춘기였던지라

나도 시 하나 잘 쓰면 대학에 갈 줄 알고,

아무런 정보도 없이 여기저기 대학에서 지자체에서 공모하는

문예 공모전에 (지금 보면 우스운) 시들을 써서 냈던

웃픈 추억도 있다.


굉장히 정부 비대칭적인

불공평한 시대였다.

수시는 더 있는 자들의 상대평가였고,

아무런 정보도 없는 지방 소도시의 소시민 자녀들에게

결국 경쟁력 낮은 학교에 수시 원서를 써볼 수 있을 정도

아니면 수능 줄서기에 뒤늦게 합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해찬 장관님만 굳게 믿었던지라

뒤늦게 배신당한 걸 알고 시작한 수능 줄서기에

인서울은 전교 10% 이내 성적에 들어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내 주변 동기들 중 2/3는 나온 점수에 맞춰 진학했고,

거진 1/3은 재수의 길을 택했던 것 같다.


아예 아무 곳에도 원서를 내지 않았던 내게

당시 고3 담임이었던 분이 했던 얘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주제 파악을 할 줄 알아야지.

적당히 성적 맞춰 아무데나 쓰면 되지"


내 개인에 대한 미래보다

대학진학률이 떨어지는 걸 더 걱정했던 담임이었다.

아직도 생각하면 기분 나쁠만한 얘기지만,

나는 더 당당히 1년 뒤에 돌아오겠다며

한 번도 연락드리지 않고 1년 후에

수능 원서를 다시 내려 학교에 들렀다.


졸업한 지 1년도 안 지났는데

내 성도 기억을 못 했던 담임샘.

그때 아쉬움이 컸던 탓인지.

안이했던 내 고등학교 3년의 추억 탓인지.

한 번도 고등학교에 대한 애정을 느껴본 적 없고,

남들은 1명 정도는 있다던

그 좋았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 하나도 없다.


공부도, 취미도, 사랑도, 우정도.

애매한 스탠스로 나와 우리를 억압하며

수능 하나로 뭉개졌던 3년이었다.


나의 학창시절은 아름답지 않았다.

그저 전근대적 풍토의 전근대적 교육관.

무조건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 최고로 대우받았고,

손사탐이라 불리던 강남 일대의 사교육 풍토가

지방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시절.


대학을 포기하고, 입시를 위해 처음 찾았던

노량진 단과반 수업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교육방송에서만 보던 스타강사들이 눈앞에 있었고

왜 저걸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을까 하는

놀라운 학습방식에 신세계를 경험했던 기분이었다.


지금은 공무원 단기반으로 자리 잡은

노량진은 원래 지방에서 올라온

재수생들의 입시학원 메카였다.



2002년 스무 살.

월세 10만 원짜리 노량진 반지하 고시원에서 시작된

가난한 내 청춘의 단상이 시작된 지점은  

어쩌면 자기 연민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넉넉했던 적이 없었던

83년생 돼지띠.


창문도 빛도 없었던 (당시 가장 비슷했던) 고시원 풍경


작가의 이전글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