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말. 아들의 중학교 성적이 마무리되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우선 드는 생각은 '이걸 어떻게 해결해줘야 하나?'였다.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말해줘야 하나...
아님 좀 더 믿어주고 자존감이 상하지 않게 다독여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가겠지만 아들의 성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하위권이었다.
"멘탈붕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머릿속은 갑자기 터지는 사진기의 셔터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중3 2학기 중간과 기말시험은 온전히 아들을 믿고 스스로 공부해 보라고 던진 시험이었다.
엄마인 나는 격려와 독려를 하며 간식과 먹거리만 부지런히 챙겼었다.
'믿은 게 잘못이었나? 믿는 게 아니었나?'
후회가 밀려왔다... 밀물처럼 끝없이 끝없이
나는 중 2학년 1학기 중간고사까지 아들과 같이 공부를 했다. 중학교 교과내용이 만만하지 않게 어렵다는 걸 느꼈다. 대학원 석사학위임에도 중학교 자습서를 끌어안고 내가 공부를 하며 모르는 문제는 아들과 함께 풀어나갔다.
그렇게 생활하니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직장에서 8시간 근무를 하고 집에 와서는 아들과 2~3시간씩 공부를 하니 체력이 바닥났다.
눈은 퀭하고 몸은 지쳐서 허리가 구부정하게 숙여졌고 그런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있으면 애들 아빠는
"스스로 해야지. 엄마가 매번 공부를 일일이 어떻게 봐주냐"며 한소리 거들었다.
그 한소리에 공감을 했던 터라 나는 유튜브를 열심히 살펴보았다.
사실 겉포장이 공감이지... 솔직히 내가 공부에서 손을 뗄 핑계, 아니 객관적인 근거자료가 필요했다.
마침 유튜브마다 "엄마 주도의 공부는 오래가지 못한다,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며
공부 코드를 강조하거나 서울대, 연고대 출신의 아들과 딸들이 자신의 공부법을 쏟아내고 있었다.
수십여 편의 동영상을 보고 나는 결심했다.
'그래, 언제까지 내가 이렇게 해줄 순 없다.
공부도 본인이 자꾸 해봐야 자신의 공부스타일을 찾아내지. 그래! 이제 손을 떼자!"
그렇게 학원과 아들을 믿고 한 학기가 흘렀다.
중 2학년 2학기 기말시험기간
수학을 모르겠다며 콴다(수학 문제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올리면 풀이가 뜨는 앱)로 풀이와 답을 검색하겠다는 아들을 보며 나는 말했다.
"학원에서 배웠는데 못 풀면 어떡해? 시험이 열흘 뒤인데."
"어떻게 푸는지 모르니까 풀이를 봐야죠."
"모르는 문제는 오답노트에 적어뒀다가 학원 선생님에게 물어봐. 지금은 휴대폰 가져가고."
시험기간에는 휴대폰을 내가 보관했기에 아들에게 휴대폰을 허락했다.
< 아들에게 휴대폰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쥐었다 하면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고 시험기간임에도 수시로 폰을 들여다보고 심지어 새벽에도 침대에서 몰래 휴대폰을 보다 들킨 적이 있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혹시나 해서 아들 방을 들여다봤는데 "혹시나?"의 의심이 "역시나!"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시험기간에는 공부에 가장 방해가 되는 휴대폰이란 이 위험한 물건을 나는 수거해 놓고 있다.>
밤이 무르익을 즈음,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들에게 학원에서 배우는 문제집을 가져와보라고 했다.
이상한 느낌은 쓰나미급의 엄청난 충격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문제집이 답만 적혀있고 깨끗했다.
"수학 문제집이 왜 이리 깨끗해? 공책이나 연습장에 풀어?"
"아뇨. 모르는 문제는 선생님이 설명해주고 동그라미 치고 넘어가요."
"모르거나 틀린 문제는 다시 풀어봐야지. 그냥 설명 듣고 고개 끄덕이면 넘어간다고?
그럼 네가 다시 풀면 풀 수 있어?"
"아뇨. 다시 안 풀어봐서 모르겠어요. 그냥 넘어가고 다음 문제를 풀거든요."
"그럼 넌 계산은 어디다 해? 문제집엔 안 적는 것 같은데."
"대부분 머리로 계산하고 어려운 건 조금 쓰면서 풀어요."
아들과 말을 주고받다 보니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중학교 수학은 눈으로 푸는 게 아냐. 손으로 쓰면서 푸는 거지. 정답만 적혀있고 채점만 되어있는 이렇게 깨끗한 수학 문제집이 어디 있냐? 이렇게 공부했으니 수학 서술형 성적이 엉망이었지."
그랬다. 서술형 문제의 배점이 30점인데 아들은 매번 한 자리 점수였다. 답은 맞기도 하나 풀이에서 점수를 거의 날려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학원에서 공부를 가르쳐주는데 엄마에게 한마디도 안했냐며 아들에게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그렇게 썰물처럼 아들을 저 멀리 몰아세우고 밀물처럼 내 잘못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솔직히 학원만 믿고 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신경을 쓰지 않은 내 잘못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바로 수학학원을 끊었다.
학원 원장님은 곧 시험인데 학원을 그만두니 황당해했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2년 가까이 시간과 돈만 낭비한 샘이라 미련조차 없었다.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믿고 맡긴 만큼 화가 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원에서 숙제를 잘해왔다고 500원씩 주었고 아들은 그 보상이 좋아서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다니며 콴다를 이용하며 숙제를 해갔었다.
학원 원장님이 500원을 주는 상황을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아들의 학원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서 학원의 전략인가 보다하며 철석같이 믿고 보냈었다. 2년 6개월을
수학 공부가 이 정도로 겉핥기에 알맹이 빠진 헛수고 일 줄은 정말 몰랐다.
시간과 돈만 버렸다. 시간과 돈도 아까웠지만 그보다 아들의 엉망인 수학 공부법이 문제였다.
학원을 끊은 날부터 수학은 애들 아빠가 가르쳤다. 애들 아빠도 다시 공부를 해가며 가르쳤기에 진도는 쉽게 나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수학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아주는 일주일이었다.
시험 결과는 학원만 의지했을 때보다는 나았지만 서술형 점수는 여전히 바닥이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직장선배의 도움으로 과외선생님을 소개받았다.
영어와 수학을 2학년 2학기 겨울방학부터 맡겼다.
영어도 유명 어학원을 다니고 입시 위주의 나름 빡신 학원으로 보냈었지만 서술형 점수는 수학처럼 깔고 성적이 저조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학과 같은 결과!
그렇게 아들의 학원은 완전 실패였다.
그런데 지금은 수학, 영어가 문제가 아니다.
그 과목이 올라가니 스스로 공부하도록 맡겨두었던 국어와 과학, 사회 등 나머지 과목의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총점 총량의 법칙"
여동생이 한 말이다.
[학부모님 안녕하십니까?
3학년 2학기 학기말 성적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나이스 학부모서비스에서 성적 열람을 하실 수 있습니다.
-00중-]
문자를 받고 성적을 열람하고 충격을 받은 그날,
아들에게 성적의 심각성을 인지시키고 수학 과외를 하는 동안 나는 바로 여동생에게 갔다.
여동생은 사립여자고등학교의 과학교사이기 때문이다.
"성적 봐봐. 중간도 못해. 이 정도는 거의 인문계 커트라인이야. 말이 되냐? 이렇게 공부를 못할 줄이야!"
성적표를 본 여동생도 심각하네라고 말하며 "중간만 가면 되는데!"라며 조카의 성적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언니야, 휴직해라."
"뭐? 휴직하면 과외비도 못 줘. 형부 월급만으로 우리 네 가족, 생활이 안되는데."
"언니가 잡고 공부시켜. 과외 끊고."
"내가 그럴 실력이 되냐? 중학교 공부도 어려워서 같이 싸매고 공부해야 하더만."
열을 내며 말하는 나를 보며 여동생이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고. 국어성적이 문제네. 국어가 안되면 다 안돼. 언니가 국어 가르쳐.
그리고 아들 시험공부할 때 점검했어?"
"아니, 한 달 공부계획표만 짜주고 스스로 하라고 했지. 엄마 주도의 공부는 안된다길래."
"언니야, 그건 공부 잘하는 아이들 경우지. 성적이 이 정도면 언니가 챙겨야지. 공부한 내용 확인하고 제대로 공부했는지 점검도 하고. 엄마 주도란 말을 잘못 이해했구만. 이 정도 성적이면 엄마가 챙겨야 해. 본인 스스로 이 많은 교과를 다 공부하려니 버거웠겠구만."
그 순간, 제대로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또다시 후회의 밀물이 마구마구 몰려왔다.
"그래. 3학년 2학기 시험이라도 챙길 걸. 그럼 이렇게 엉망은 아니었을 텐데..."
"영어는 잘하네. 다른 과목들 수행평가 점수도 괜찮고.
내가 볼 때 공부머리가 없는 건 아니고 공부를 안 한 거야.
아님 성적이 오른 과목의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과목이 소홀해져서 점수가 떨어진 거고.
총점 질량의 법칙이 있거든."
"총점 총량의 법칙? 지랄 총량의 법칙 같은?"
"응. 지랄을 떠는 것도 어느 시기에 더 많이 떨고 덜 떠느냐지 총량은 정해져 있다잖아.
성적도 오른 과목만큼 떨어지는 과목이 생기지. 하지만 총점은 거의 변하지 않아."
그랬다. 동생의 말이 맞았다.
내 아들의 총점은 정해져 있었다.
문제는 그 총점이 중간보다 낮고 친구들 평균보다 낮다는 것이었다.
"내 잘못이 크다. 네 말대로 맡겨두는 게 아니라 언니가 차고앉아서 점검해주면서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살펴봤어야 했는데..."
나의 어두운 표정과 의기소침한 모습에 동생은 태도를 바꾸어 또 다른 현실적 조언을 해주었다.
"집에 가면 너무 야단치지 말고 100일 계획을 세워. 고등학교 공부는 중학교와 달라.
국어만 예를 들어도 수능 국어 시험지가 16쪽인데 80분 안에 다 풀어야 해.
지문이 한 바닥이고 문제는 두 문제 정도. 또 다른 지문이 한 바닥 정도이고 관련 문제 몇 개가 끝이야.
그럼 1문제당 2분 안에 풀어야 하거든.
웬만한 선생님들도 그 시간 안에 다 못 풀걸. 그런데 그걸 고등학생들이 풀어."
"대한민국 교육이 미쳤네!"
나도 모르게 미쳤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동생은 노트북을 가져와 실제 모의고사 문제를 보여주었다. 미쳤다는 표현은 정확한 표현이었다.
"수학, 과학 등 다른 과목들도 보통 1분 30초에 한 문제씩 풀어야 다 풀 수 있어."
"시간 안에 문제도 다 못 풀겠네."
"맞아. 그래서 과학도 시험지가 4장이면 3장 정도 풀고 한장은 아예 못 푸는 아이들도 많아.
푼 문제라도 정확하게 풀어야 점수가 나오지."
"미쳤네."
나는 연신 교육이 미쳤다는 생각뿐이었다.
대한민국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음으로 화가 치밀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어서...
'수능 출제자들, 교육부 사람들도 매년 수능 쳐봐야 해. 그래야 얼마나 어렵고 힘든 지 알지.'
이런 불만들로 가득한 나에게 동생은 부드럽게 말했다.
"본인도 제 성적 보고 든 생각이 있을 거야.
지금부터 언니가 국어 공부시키고 다시 잡아줘."
"알았어. 고마워."
그렇게 두어 시간의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머리가 더 복잡했지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었다.
'동생에게 달려가길 잘했네.'
빙산의 일각만 들은 수능과 모의고사 정보였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쇼킹했다. 그리고 정작 아들은 제대로 챙기지 않고 나는 왜 그렇게 직장과 일을 열심히 했는지...
피곤하다고 핑계 대고 스스로 공부해야지라며 정당화하며 신경을 쓰지 않은 나도 정신 못 차리고 살아놓고는 아들만 정신 못 차리고 사는 것처럼 말했는지... 후회의 밀물이 다시 밀려왔다.
후회만큼 스스로를 힘들 게 하는 게 있을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머릿속의 후회란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휴직"이란 동생의 말이 강하게 뇌리에 맴돌았다.
휴직할 수는 없지만 휴직을 생각할 정도로 나도 마음을 다잡아야 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 공부를 제대로 안 했던 아들도 문제지만
방치한 나도 문제였어. 다시 시작해보자.
내 아들이 미친 대한민국의 모의고사와 수능 문제에 또다시 혼자 버거워하지 않도록!'
"아들아, 너도 힘들었지. 엄마는 널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 게 후회되네. 미안해.
이제 엄마가 도와줄게. 같이 해보자."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나는 후회하는 점과 미안한 점을 솔직히 털어놓으며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착한 아들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