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유유상종의 법칙
만남은 무엇인지? 또 그 사람들을 왜 만나야 하는지? 만남은 피하고 싶으면 피할 수 있는 것인지? 에너지의 법칙을 알게 되면 에너지 상태가 같은 사람들끼리 또 의식의 척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마디로 에너지 유유상종의 법칙이다. 에너지는 비슷한 에너지끼리 뭉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당신의 에너지가 지금 다운되어서 그야말로 되는 일이 없다면 당신은 일부러라도 에너지가 좋은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만남은 에너지 상태가 같은 사람들끼리 또, 의식의 척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에너지 상태와 의식의 척도는 자신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이 수시로 변하듯이, 사람의 에너지 상태와 의식의 척도는 수시로 변한다. 또 변하는 상태에 따라 그 수준의 사람들과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만남은 당신 스스로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만남은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끼리의 에너지 교류이기 때문에 만남은 필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해가 안
가는 독자를 위해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비슷한 에너지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글을 읽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동일 에너지의 합일점 하에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분명 이 글을 클릭해서 읽는 독자들은 “되는 일이 없거든 주변인을 손절하라!”란 제목 에너지에 끌려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 독자 여러분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싶어서 헬스클럽에 등록했다면 헬스클럽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만나는 사람들과 어느 면에서는 비슷한 에너지의 합일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당신과 만나는 그 사람들도 당신과 비슷한 이유 때문에 당신과 비슷한 시기와 시간에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면 당신의 에너지를 오히려 down 시킬만한 사람과는 일부러라도 만남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 당신의 에너지가 down 상태에서는 그 누구의 에너지로 UP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쩐지 비겁해 보일지라도 당신의 에너지가 충만되기 전이라면 당신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사람과의 관계를 과감히 정리하거나 잠시 동안 휴지기를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 서로 힘든 에너지끼리의 결합은 더 힘든 에너지로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성경 역시 이러한 에너지 유유상종의 법칙을 간파하고 분노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은 일단 피하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개신교 성경 잠언 22:24-25).
번역의 문제로 인해 위 성경의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독자들을 위해 가톨릭 성경의 동일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화를 잘 내는 자와 사귀지 말고 성을 잘 내는 자와 다니지 마라. 네가 그의 길에 익숙해져 너 스스로 올가미를 써서는 안 된다." (가톨릭 성경 잠언 22:24-25)
만약 본인의 에너지가 타인의 분노와 슬픔을 감싸 안고 극복해 줄 만큼, 예를 들면 예수님이나 부처님 정도로 에너지가 강한 사람이라면 굳이 분노한 자, 울분에 차 있는 불행한 주변인들을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해 대다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타인의 불행한 에너지에 전염될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분노한 자, 우울한 자, 불행한 자의 에너지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기만 한 필자의 후배는 불행한 자, 분노한 자, 우울한 자를 자신이 위로해 줘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사실 필자는 사랑이 많은 그 후배의 인품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상대함으로써 그녀는 몹시 지치고 힘들어하고 심지어 자주 아프기까지 한다. 그녀가 아프다는 건 그녀가 주변의 좋지 않은 에너지에 전염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필자는 그녀에게 이젠 그만 자신의 미약한 에너지로 주변의 안 좋은 에너지를 감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먼저 본인의 에너지부터 충만하게 할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분노와 불평불만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독을 뿌리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느끼는 안 좋은 에너지를 동일하게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하고 불평불만하는 사람들의 주변은 항상 위험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킬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자주 곤경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 탓하며 분노하는 자, 우울한 자, 불행한 자와 교류하는 것은 결국 자신도 심각한 문제에 함께 빠져들 단초를 제공하는 행위가 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필자의 후배처럼 아무리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이 강하다 하더라도 자신이 타인의 불운한 에너지를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불행한 혹은 분노한 에너지는 일단 피하고 보았으면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에너지에 동화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불경에도 앞서 예를 든 성경과 유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이 어느 날 바라문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들르게 됐다. 바라문들에게 설법을 하고 난 뒤 부처님은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바라문들이 함께 가기를 청해 그들과 같이 길에 올랐다. 부처님과 바라문들이 길을 가는 도중에 길 위에 어떤 종이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부처님이 그 종이를 집어오라고 일렀다. 한 바라문이 종이를 집어오니 부처님이 물었다. “그 종이가 어디에 쓰였던 것이냐?” 바라문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필시 향을 쌌던 종이임에 분명합니다.” 그것을 어찌 알았느냐하고 부처님이 재차 물었다. “아직도 향내가 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새끼줄이 떨어져 있었다. 부처님은 그 새끼줄도 집어오라고 일렀다 “이것은 어디에 쓰였었는지 알 수 있겠느냐?” 부처님이 또 바라문에게 물었다 바라문은 “이 새끼줄은 생선을 묶는데 쓰였던 것입니다”하고 대답을 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 하자 바라문은 “아직도 비린내가 많이 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인연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사물은 본래 깨끗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죄지을 인연을 만나면 죄를 짓게 되고 복 받을 인연을 만나면 복을 받을 일을 하게 된다. 부처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마음이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과 함께 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커지고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사람과 가까이하면 재앙을 받을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저 종이와 새끼줄처럼 향을 가까이하면 향기롭게 되고 생선을 싸게 되면 비린내가 나게 되는 것이다. 조금씩 물들면 몸에 배어들게 되는데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부처님의 말씀과 비슷한 것으로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다. 검은 것을 가까이하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뜻이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주위 환경에 따라 변하게 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처음부터 여러분의 에너지가 주변의 부정적인 에너지와 유유상종한 에너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에너지를 가진 사람과 가까이하다 보면 여러분의 좋은 에너지도 부정적인 에너지의 영향을 필연적으로 받게 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근묵자흑의 원리이다. 근묵자흑의 원리에 의해 여러분들이 가진 긍정적인 에너지가 주변의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슷한 류로 떨어지는 유유상종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 역시 여러분들이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다시 한 번 기억해 두자. 당신의 에너지가 너무 충만하여 그 에너지를 타인에게 나눠줄 정도가 아니라면 일단 에너지가 고갈된 사람과의 만남은 의도적으로 손절하는 것이 당신의 인간관계에 좀 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