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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Jun 10. 2022

붙잡지 못하고 스쳐지나간 또다른 내 영혼.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녀를 만난 건 1년 남짓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와 함께 갔던 곳과 그때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내가 해외 이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진한 쌍꺼풀과 구릿빛 피부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항상 누군가와 밝게 웃고 있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기에 그녀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북적였다.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던 아이가 없었더라면 미혼이라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와 우연치 않게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녀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남편을 따라 해외생활을 하고 있던 이민 선배였다.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운전이 무서워서 좀처럼 집 밖을 나가는 일이 없었다. 집에서 은둔하고 있던 나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하루는 자신의 집에 초대하겠다면서 나를 데리러 우리 집까지 손수 차를 운전해 왔었다. 


아이가 있는 사람과 아이가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대화는 무척 한정적이다. 아이가 있는 사람의 대화는 대부분 아이와 관련된 내용이다. 아이가 없는 나는 그들과 대화할 때마다 그저 ‘오호, 그렇군요.’ ‘와, 똑똑하네요.’라는 반응을 건넬 뿐이다. 그러나 그녀와의 대화는 달랐다. 아이는 그녀의 삶에서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나를 배려한 것인지 나와 이야기를 할 때면 아이 이야기는 자주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내면을 말했다. 그녀가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는 꿈,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방랑의 흔적을 이야기해주었다. 한국이었다면 이미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여길 나이에 그녀는 여전히 어느 나라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그저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 떠돌아다니는 삶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가방 하나 메고 혈혈단신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늘을 나는 철새처럼 남편의 직장을 따라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런 그녀를 보고 우리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나이기에 방랑하는 삶을 사는 그녀는 그저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해. 언니가 많이 부족하지..?” 그 한마디로 나는 자유분방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던 언니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했다. 그 말을 기점으로 그녀는 자신의 불안을 털어놨다. 말을 건네는 언니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빛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는 않았지만, 위태로웠다. 지루한 일상을 박차고 끊임없이 떠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딘가에 머물고 싶어 했다.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던 그녀는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 몰랐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녀의 말과 눈빛, 그리고 행동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느낄 수 없었던 영혼의 결을 느꼈다. 지금에서야 추측하건대 그녀 또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흔들리던 게 아니었을까. 그때부터 나는 그녀에게 빠져들어 간 것 같다. 전혀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나와 비슷한 취향과 사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카타르시스를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느꼈다. 그녀가 곧 떠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의지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는 종종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시차 때문에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급하게 끊어지기를 여러 번. 이제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는다. 1년에 두세 번 하던 연락도 이제는 끊긴 지 오래다. 그러나 참 신기하다. 그녀와 만났던 기간보다 몇 배나 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녀는 내 기억에서 반짝인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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