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는 영어를 좀하는 편이다. 다만, 단서가 붙는다. 내 나이 또래, 어렸을 때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 치고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겨울 방학 때 같은 반 친구의 엄마가 친구랑 같이 영어 과외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주셨다. 그 친구 사촌 언니가 영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인데 사촌 언니랑 친구랑 1:1로 과외를 하면 수업이 잘 안 될 테니 나도 같이 수업을 같이 하자고 하신 것이었다. 아마 시세보다 싸게 해 주신 거 같은데 한 달 5만 원인가 10만 원을 내고, 성문기초영어를 뗐던 기억이 난다. 영어 공부를 미리 하고 중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그때 한두 달 공부한 성문기초영어로 중학교 3년은 아주 편하게 다녔다.
문제는 외국어고등학교를 가면서 생겼는데 외국인이라고는 만나본적이 없었던 데다가, 영어공부를 미리 하고 온 아이들과 달리 내 영어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고 갑자기 어려워진 학교 수업을 따라가느라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시간이 4시간이면 거의 4시간을 영어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거의 일 년을 영어만 공부하니 영어가 좀 잡히긴 잡혔다.
대학 때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지하철로 학교 가는 길에는 스티븐 킹, 존 그리샴 같이 스토리가 재미있어 잘 읽히는 작가의 책들을 읽었다. 밤에는 영어공부도 할 겸, 불면증 해소도 할 겸,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위한 당시 유일했던 영어 채널)을 틀어놓으면 그래도 단 몇 분이라도 영어를 들을 수 있고 잠도 솔솔 오니 일석이조였다. 내용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면서, 잠이 드는 시간은 늦춰졌지만 그만큼 나의 영어 듣기 능력은 향상되었다. 케이블 티브이가 들어오면서부터 나도 RM처럼 프렌즈로 영어 공부를 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호주로 떠난 교환학생. 노는 것이 공부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놀다 보면 항상 시간에 쫓겨 리포트 쓸 시간은 하루 밖에 없었고 한국에서는 영어로 리포트를 쓴 경험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궁하면 통한다고, 하룻밤을 새면 이십 페이지 정도 리포트는 쉽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들어간 첫 직장. 한국 회사이지만, 클라이언트는 모두 외국 회사였기 때문에 영어가 중요했다. 당시 굉장히 앞서 나가시는 사장님이었는데 토플인가 토익 성적이 몇 점 이상이면 연봉에 추가로 200만 원을 더 주셨고, 나는 당연히 그 200만 원을 받았다. 당시에는 연봉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200만 원이면 꽤 큰돈이었다.
그다음 두 번째 직장도 한국 회사였지만 회사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고 마케팅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고 이곳의 사장님도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우면 추가로 수당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그때 그 제안을 덥석 받아 들었어야 하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부족한 영어나 더 하겠다고 하며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20년 동안 외국계 회사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점점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접하면서 자란 젊은 직원들이 들어왔고 내가 하는 영어로는 영어를 잘한다는 명함을 내밀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뭐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싱가포르로 옮기면서, 아시아 사람들이 아니라 미국 본사 소속으로 주로 미국 본사 사람들과 일하면서 영어의 한계를 느끼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하루 업무의 20-30%를 영어로 하는 것과 100%를 영어로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점심시간에도 계속 영어로 말하면서 식사를 하니, 식욕이 사라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원어민이 아니면서 영어로 업무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같은 내용을 한국어로 하면 얼마나 더 설득력 있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아는 다른 한국인 동료는 자기 매니저에게도 “나는 영어로 일하면 50%는 더 멍청하다고 생각하면 돼.”라고 대놓고 이야기한다는데 나는 차마 그렇게 대놓고 이야기는 못했지만 음 50%가 아니라 70%는 더 멍청해진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일할 때는 나는 많은 한국인이 그렇듯 읽기와 쓰기는 잘하는데 듣기와 말하기를 잘 못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착각이었다. 방대한 자료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머릿속에 입력하는 것이 일의 시작인데 일단 읽기에서부터 막히니 나머지 일들도 줄줄이 꼬였다. 게다가 속도는 한국어로 읽는 것보다 적어도 세배는 느려진 느낌이었다. 말하기보다는 듣기가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100% 이해가 되는 일은 드물었고 대부분 70% 정도, 운 좋으면 80% 정도 선에서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나 빼고 모두가 혹은 대부분이 원어민인 회의에서 사안을 설명하고, 전략을 제시하고, 때때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설득하는 과정까지, 하루 종일 영어로 일하고 나면 그야말로 진이 빠졌다.
다행히 5년간 영어로만 일을 하면서 원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영어가 늘긴 는 것 같다. 뭔가 조금 편하고, 뭔가 조금 자연스러운 그런 느낌. 하지만 퇴사를 한 이후, 현재 특별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고 있기 때문에 영어 실력이 줄어들 것이 걱정스럽다. 지난주에 오랜만에 친했던 동료를 만났는데 확실히 영어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아직 책까지는 더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안 들지만, 그래도 영어 드라마 시리즈는 일부러라도 많이 찾아서 봐야겠다.
첫 직장에서 200만 원 연봉 인상의 효과를 가져다주고, 외국 회사에서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해 준 고마운 영어였지만 어느 순간 영어는 나에게 ‘이놈의 영어'가 되었다. 영어만 아니었다면, 한국말로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영어공부하는데 이렇게 좋은 시기가 있었나 싶다. 유튜브에서 훌륭한 영어 선생님들께 공짜로 영어를 배울 수 있고 (내 최애는 빨간 모자 선생님 www.youtube.com/@LVACDMY), 넷플릭스에는 영어 콘텐츠가 넘쳐나고 (최근 발견한 가볍게 보기 좋은 콘텐츠는 영 쉘던), 인공지능 툴 (Chat GPT, Gemini)에 내가 쓴 영어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첨삭을 시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