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서야 마주하는 꽃의 얼굴이 참 아름답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검붉은 판으로 겹겹이 노란 볼을 둘러싼 모습이 좋았다. 화려함과 거리가 멀다고 하지만 그 빛깔은 전혀 소박하지 않다. 흰 솜털이 사이사이로 내비치는 어두운 적색에서 고혹적인 절개가 흘러나온다. 손으로 살며시 턱을 들어 고개를 세우고 눈을 맞추어본다. 인제야 마주하는 꽃의 얼굴이 참 아름답다.
우리나라의 어엿한 자생종임에도 나는 할미꽃을 자주 뵈지 못했다. 내가 살던 도심에선 찾기 힘들고 다른 꽃들에 비해 화려함이 밀려서 그런지 식물원이나 행사 날 화단 같은 데에도 잘 없다.
나는 화려함을 치사량까지 끌어올린 꽃들보다 그윽이 눈부신 할미꽃이 더 좋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할미꽃을 알았지만 실제로 본 것은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3월이 지나가지만, 아직 초봄 같은 날, 바람이 볼 시린 향기를 싣고 왔다. 녹은 눈이 스며들어 한지처럼 바닥에 눌어붙은 낙엽과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는 새싹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아웅다웅 대고 있었다. 모든 것이 탄생하는 봄이라기에 이날 산은 참으로 생동감이 없었다. 오늘은 친가 식구들과 함께 새로 만들 가족 납골당의 묫자리를 보러왔다. 기존엔 분묘 형태로 증조할아버님까지 모셨다. 하지만 이제 그런 형태의 묘소는 할머니 대에서 바꾸겠다고 선언하셨다. 자식들이 관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분묘로 된 산소는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 그 위에 떼를 심기 때문에 그것을 관리하는데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여름마다 잔디를 깎고, 가을이면 낙엽도 치워야 된다. 낙엽이 너무 많아 치우기가 어려우면 산소 주위에 잎이 넓은 활엽수들을 베어버려야 할 때도 있다. 커다란 낙엽은 잔디 위를 덮어 자라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다. 또 가끔 제사를 지내고 나면 멧돼지가 술과 과일 냄새를 맡고 산소를 파헤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흙을 고르게 펴고 다시 떼를 심어줘야 한다. 이만한 노력은 희생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산소가 집 앞에 있으면 모를까 차가 안 막히고 가려면 새벽같이 나와야 하니 가는 것도 오는 것도 노동인 셈이다. 게다가 산소를 관리하는데 사용하는 풀 깎는 장비는 산 아래 자리한 마을에서 빌려 같이 사용한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가족과 피가 이어졌다고 전해지는 머나먼 친척 사람들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선 지금까지 그들과 친분을 유지하시며 함께 산소를 관리하고 제를 지내셨다. 마을 사람들과 친한 것은 조부모님뿐이다. 지금이야 할머니가 주도하시니 괜찮지만, 나중이 문제다. 이 모든 것을 따져봤을 때 이번에 납골묘를 만드시겠다는 할머니의 선택은 지혜로웠다. 할머니는 그런 분이시다. 자식의 안위와 미래의 안녕을 바라보시는 분.
나는 한 번도 할머니께서 무언가에 대해 우리 앞에서 불평하시는 걸 들은 적이 없다. 할머니는 항상 자식 앞에서 그런 말을 아끼셨다. 손주인 나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셨다.
수 년 전 할머니께선 무릎 수술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내가 이 소식은 들은 건 가족 중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이래 봬도 동생 하나 없는 우리 가족의 막내다. 당시에는 더 어렸고 어린 나에게 할머니의 입원 소식은 나중에 알려졌다. 병원에 갔을 땐 수술을 끝마치신 할머니가 침대에 누워계셨다. 이미 나올 눈물과 걱정, 일어날 혼란은 다 잠잠해진 상황이었다.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병실은 상당히 북적거렸고 나는 꼭 기차역에 마중을 하러 가듯 할머니를 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때 다른 가족들은 할머니의 입원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자신의 병세를 알리지 않아 누구도 할머니의 상태가 그 정도로 악화한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머니께서 하루아침에 쓰러지셔서 병원에 가셨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무릎 수술은 온전히 할머니의 계획 아래에 이루어졌다. 이미 의사와 상의 끝에 준비하신 것이라 입원 소식을 들을 때만큼의 충격은 더 번지지 않았고 큰 걱정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할머니는 이런 분이시다.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건강과 재산과 미래와 죽음까지도 생각하시고 계획하시는 분이다. 이건 굉장히 대단하신 부분이다. 정말 다른 이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면 자신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최악의 경우 침묵과 의존이 함께 했을 때 그것은 짐이 되고 폐가 된다.
시간이 지나 할머니는 당시의 경험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수술 후에 다시 걸을 수 있도록 재활을 하셨다는데 매번 재활 치료사가 다리를 펴고 누를 때마다 아파서 소리를 지르셨단다. 한 번은 재활사를 발로 차셨다는데 이건 아마 웃으라고 하신 말 같다. 하지만 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절대 웃을 수가 없었다. 재활이 그렇게 아프셨는데 수술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아니 안 아프신 순간이 있으셨을까? 수술을 결심하시기 전부터도 아픈 무릎으로 참아가며 생활하셨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 그 무릎에 앉고 또 할머니가 누이시는 대로 허벅지를 베면서도 그 얇은 나일론 바지 밑에 그악한 고통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갑자기 내 가슴이 시린 무릎처럼 아파졌다.
나는 우리 할머니의 손을 잡고 산길을 앞장섰다. 납골당의 묫자리를 둘러보고 돌아가는 길에 고조할아버님 분묘를 뵈고 갈 생각이었다. 차를 타고 빙 돌아가기가 귀찮아 비탈을 가로지른다는 게 그만 길이 조금 험해졌다. 할머니는 수술 후에도 다리를 완전히 펴지 못하셔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괜히 이 길로 왔나 싶었다. 할머니는 군소리 하나 없이 속도도 늦추지 않으시고 나아가신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나를 잡으신 손에 전해지는 악력. 나무뿌리 하나를 넘고 낙엽 한 장에 올라설 때마다 점점 힘이 들어가는 주름진 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고 할머니는 내 손을 살며시 놓아주신다. 그리고 그때 아마 나만이 보았을 거다. 반대 손에 쥐고 오신 지팡이가 평지를 더듬으며 가늘게 요동치던 것을 말이다. 그 와중에 손주가 힘들까 봐 지팡이에 너무 힘을 주신 탓일까? 고른다고 고른 튼튼한 나뭇가지가 조금 휘어 보인다.
고조할아버님 묘는 대여섯 개의 묘들과 함께 자리했다. 이곳은 관리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잔디와 비석과 비탈의 떼까지도 깔끔하고 무성했다. 봄이라 색이 노랗지만, 나중에 여름이 되어 싱그럽게 되살아날 것을 생각하니 기대가 된다. 방금 보고 온 납골당 묫자리도 꽤 양지바른 곳이었는데 이곳 묘지는 그 어떤 풀잎 하나 소외되지 않고 다 함께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오늘은 묫자리 보러온 게 주목적이라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어른들은 군데군데 모여 잠시 쉬어가거나 묘 앞에 짤막하게 절을 했다. 나는 홀로 떨어져나와 대여섯 개의 묘들을 둘러싼 잔디 비탈을 따라 구경에 나섰다. 아무리 묘에 잔디만 심으려고 노력해도 야산인지라 온갖 풀씨가 날아와 나 없소 하며 잔디와 뒤엉킨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차마 엉키기에 그 존재감이 너무도 강렬했던 꽃을 만났다. 다섯 송이 정도 되는 할미꽃이 오순도순 모여 이른 개화를 이뤘다. 그 붉은빛은 시린 날 노랗게 바랜 잔디들 위에 더더욱 따스했다. 나는 살포시 꽃잎에 손가락을 얹어본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흰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올올이 빼꼼 비치는 촉촉한 꽃잎은 생기를 뿜으며 선연히 빛났다. 그날 나는 할미꽃을 처음 보았다. 도시에만 살아 그런지 내겐 그 짧은 시간이 더없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도 우리 할머니는 정정하시다. 힘은 잃어가시지만, 그 총기와 명기는 여전히 생기로우시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많이 지냈지만, 조금이나마 할머니를 알게 된 건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이젠 할머니와 멀리 살아 거의 명절에만 뵈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겐 할머니를 이해한 시간이 더더욱 생생한 감사로 여겨졌다. 털옷에 숨은 붉은 할미꽃을 보았듯 나는 우리 할머니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제와 내가 본 할머니는 나를 무릎에 누이신 사랑의 할머니와 겹쳐보이며 더 밝고 아름답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