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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 Aug 05. 2021

피, 땀, 눈물

TV로 올림픽 보기

신입사원으로 처음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놀라웠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회사에 갔는데 그야말로 발에 치이는 게 TV였다. 어디서든 제품을 테스트하고 비교해볼 수 있도록 일하는 공간 도처에 TV가 마련되어 있었고, 심지어 모든 회의실에도 회의자료를 띄우는 희뿌연 프로젝터 대신 대형TV가 사용되고 있었다. 때문에 혹여 회의자료에 오타가 있으면 가감없이 선명하게 볼 수 있었고, 간혹 회의실에서 앞자리에 앉게 되는 날이면 TV를 코앞에서 본다고 엄마한테 혼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들이 문화 충격이었지만 어느새 이런 곳에서 10년을 일하다보니 엄청난 크기의 TV에도, 쨍한 화면에도 무감각해졌다. 당연히 화질에 대한 감흥도 일반인보다 덜 했다. 대형TV에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볼 때에, 일반 소비자가 “우와 영화관에서 보는 것 같다!”라고 느낀다면, 나는 “블랙이 안 뭉개지고 잘 나왔네. 근데 전반적으로 블랙감이 너무 많아서 컬러 표현할 컨텐츠로는 안 좋겠네.” 같이 건조하게 평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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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거거익선이라고 홍보하는 마케터로서, 언행일치를 위해 75인치 UHD TV를 집에 들였다. 75인치는 직사각형 모양 TV의 대각선 길이를 의미한다. 75인치가 약 189cm인 것을 생각하면, 키 큰 남자 농구선수를 대각선으로 놓은 정도 크기의 TV다. UHD TV는 가로 3,840개, 세로 2,160개의 픽셀로 이루어진 TV를 말한다. 즉, 한 TV화면에 8백만개가 넘는 픽셀이 있는 셈이니 그야말로 땀구멍 하나도 뭉개지지않고 다 보여주는 요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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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려고 TV를 틀었는데 올림픽 기간이라 뉴스 대신 올림픽 경기 중계중이었다. 나는 야구, 쇼트트랙 스케이팅처럼 대중적인 스포츠에 대해 아주 평균적인 관심은 있는 편이지만, 스포츠 경기를 챙겨보지는 않는다. 급한 성격 탓에 야구처럼 몇 시간씩 계속 되는 경기는 답답해서 하이라이트만 몰아볼 때가 많고, 콩알만한 심장 탓에 쇼트트랙처럼 한 순간의 실수로 운명이 달라지는 경기는 가슴 떨려서 결과가 나온 후에 마음 편히 챙겨보곤한다.


TV에서는 남자 체조 도마 경기가 하고 있었다. “체조..그..양학선?” 정도가 내가 체조에 대해 알고 있는 배경 지식의 전부였다.

화면에 비추고 있는 선수를 보니 양학선 선수가 아니라 신재환이라는 선수였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고, 딱 봐도 얼굴이 아주 앳되어 보이는 선수였다. 아직 어린 선수고, 올림픽 메달을 노리기보다는 출전 경험에 더 의미를 두는 선수겠구나 하고 내 맘대로 단정지었다. 크게 관심있는 경기 종목도 아니고 메달권 선수도 아닐테니 내 콩알만한 심장도 충분히 견뎌줄 수 있을 것 같아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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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환 선수가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카메라는 도약을 준비하는 선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많이 긴장되는지 계속해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는데 뜨거운 날숨이 화면 밖으로 나오는 것 같이 느껴진다. 심호흡을 할 때마다 앳된 얼굴의 여드름 자국과 짧은 반곱슬 머리카락이 함께 호흡따라 움직인다. 긴장한 선수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보니, 화질의 디테일을 평가하던 건조한 나는 온데 간데 없고 덩달아 나까지 같이 긴장이 된다. 이렇게 긴장될 줄 알았으면 안봤을텐데 지금이라도 채널을 돌릴까 고민하던 찰나 신재환 선수가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는 속도 영향을 받아 한껏 뒤로 젖혀진 짧은머리와, 바람의 영향을 절대 받지 않으려는 듯 꽉 다문 입이 대조된다. 달리기를 끝내고 순식간에 날아오르더니 곧은 자세를 뽐내며 하늘을 휘휘 돌다가 발을 땅에 내딛는다. 도대체 스쿼트를 몇 번 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날카롭게 갈라진 허벅지 근육부터 다시 날아갈 것처럼 하늘로 뻗은 양 팔의 근육까지, 온 몸의 근육들이 힘을 합쳐 찰나의 순간을 견딘다.


금메달 확정이다.

여느 때 같았으면 다음 날 “남자 체조 신재환, 금메달 획득!” 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핸드폰으로 보고 “오 ~ 금메달 하나 더 추가됐네! ㅊㅋㅊㅋ”의 반응을 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픽셀이 어떻고, 최대 밝기가 어떻고, 모션감이 얼마나 좋고, 큰 화면이 몰입감을 주고 등등 마케터로서 기계적으로 외웠던 TV의 스펙들이 나의 경험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심호흡을 할 때 나오던 선수의 입김, 호흡과 함께 흔들리던 머리카락, 떨리던 근육까지 TV가 모두 보여주었다. 도약부터 착지까지 걸린 시간은 몇 초 남짓이었지만, 이 몇 초의 순간을 위해 흘렸을 피, 땀, 눈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마치 온 근육이 힘을 합쳐 착지 후 신재환 선수가 넘어지지 않도록 버텨준 것처럼, TV의 온 스펙이 힘을 합쳐 선수의 인고의 시간과 노력을 함께 나누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감흥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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