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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Aug 10. 2021

‘안’녕하십니까

김유담 작가의 안을 읽고

-김유담, 안(安)



신기할 정도로 금방 읽힌 김유담 작가님의 안.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현실적이어서 불편했던 이 작품의 제목은 '안'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나'의 편안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결단을 보여주는 과정이어서 제목이 안일 지도 모르겠다. 가장 가까운 여자인 엄마의 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는 인물이 나와 동떨어진 인물로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저주 같은 엄마의 조언이 그저 힘이 없는 주술로 존재하길 바라지만서도, 실은 그것이 진짜 여성의 삶이라는 참담함이 느껴졌다. 여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안정적 직장이 없는 것과 결혼을 하는 것이 여자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당신은 이미 아셨겠지. 그 저주 같은 조언엔 씁쓸한 현실과 예쁘게 포장되지 못한 진심이 담겨 있다. 그렇지만 날 것 그대로 그다음 세대 여자에게 던져진 조언은 때로 너무 아프고 날카로워서 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살아남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오역될 때 엄마와 나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 가장 가까운 여자에게 인정받고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은 건 모든 여자의 바람일 테니까. 그 정신적 간극을 채우는 것은 큰 엄마의 몫이 된다.  큰 엄마와 엄마의 마음 모두 이해가 된다. 엄마는 딸이라는 다음 세대의 여자가 능력 있고 똑똑하게 살기를 바랐을 테고, 큰엄마는 그것에서 내가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랐을 테다. 여자가 서로를 살게 하는 존재가 되려면 우리는 가까운 여자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



작품 속 큰 엄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안타까운 엄마의 모습을 모두 가진 인물이다. 큰 엄마에 대한 서술이 작품 속에 정말 많이 등장하는데도 나는 여전히 이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 묘하다. 한 집의 '큰 엄마'라는 속성을 지우면 이 사람에 대해 전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꿈을 꾸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떤 라면을 좋아하는지 정도? 부엌과 집 밖의 이야기는 마치 애초부터 없었던 것만 같다.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가사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한 가족이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자의 노동이 필요했고 필요할까. 그런 노동은 없을 때는 티가 나지만 제대로 되고 있을 때는 티가 나지 않는다. 집안일은 돌아서면 다시 원점이라는데 멀리서 봤을 때에도 계속 원점인 일이다. 그런 원점회귀적인 일은 왜 여자의 몫이 되고야 마는 걸까. 내가 빚지고 있는 엄마의 노동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잘 개어진 빨래와 한 번도 신경 써본 적 없는 욕실, 삼시세끼 차려지는 밥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은 내가 혼자 살게 되면서 더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도 그 어떤 것을 감당하고 있을 유능한 중년 여자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린다.



나는 여성주의자들이 무조건 비혼주의자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성은 여성인 동시에 누군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여성으로 하여금 누군가를 사랑하지 말라 라고 말은 상당히 폭력적으로 들린다. 여성이 단 하나도 포기하지 않길 바랄뿐더러, 포기해야 하는 것에 사랑이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배제하고 나면 우리가 가고야 말 유토피아에는 어떤 여자들이 존재할까. 아마 함께 간 여성보다 함께 가지 못한 여성들이 더 많을 테고, 나 역시 어떠한 이유로 배제될지 모른다. 그건 절대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다만, 지금 이곳이 낙원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우리의 사랑이 사랑으로 존재하기 위해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가부장제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공이라는 개인은 '나'와 취향도 성향도 잘 맞는 사람이었지만, 그 개인이 가부장제 속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여성에게 폭력적인 존재가 된다. 은연중에 일을 그만두길 바라고, 가정에 집중하길 바라는 게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너 가르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지가 뭔데 널 주저앉혀."라는 문장에 나를 키운 엄마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공이 그랬던 것처럼 이 감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부터가 가부장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한쪽에겐 설명할 필요도 없고 설명을 해야 겨우 이해해봄직한 일이 한쪽에겐 큰 압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늘 말하지만 이건 개인의 착함과 좋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가부장제에 편입되는 순간 한쪽이 우위를 점하고, 또 다른 한쪽은 그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를 깎아 누군가에게 '안'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질 못한다. 나는 그냥 평생 나로 살고 싶다. 나는 나를 포기할 정도로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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