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left wondering where they are meant
내가 그린 누드 크로키를 보며,
왜 까미유 끌로델이 떠오르는 걸까.
그녀는 시대에 갇힌 천재였다.
타고난 재능을 지닌 소녀가,
로댕이라는 거장의 그림자 속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날개를 펼치지 못한
그 고통과 갈망이 나를 찾아오는 것 같다.
그녀의 꿈은 제약에 눌려,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언제나 구속당한 채 흘러갔다.
엄마는 가끔,
“엄마는 생활력이 없자나, 능력이 없자나…”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왜?라는 물음보다는 그렇구나..라고
차라리 왜가 맞는 질문이었을지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누구보다 많은 책을 읽으셨고,
역사에 대한 지식은 누구보다 풍부하셨다.
어쩌면 어느 대학 교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언제나
출구 없는 공간 속에 갇혀 계셨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한계가 아니었다.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펼칠 길이,
자신의 상상력을 세상에 내보낼 창이 없었다는,
그 안에서의 괴로움이였다.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면,
어디선가 늘 "누군가의 아내로서, 누군가의 엄마로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마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속 천재 피아니스트 대니의 삶처럼,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펼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고독과도 같았다.
그 소중한 재능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어머니의 삶이, 내 삶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나 역시, 아직 그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걸음을 떼고 있지 못한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그 ‘잃어버린 꿈’을
어딘가에 묻어두고 살아가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틀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누군가의 꿈이, 누군가의 삶이
자신만의 날개를 펴지 못하고 한계에 갇혔을 때,
그 안에서 숨어 있는 미완성의 이야기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