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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로 Jul 18. 2022

기억으로 기록하고, 기록으로 기억될 것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옛날 캐논 카메라의 광고 카피다. 카메라를 팔기 위해 만들어진 문구인 걸 모른 채 막 갖다 쓰는 사람이 십중팔구겠지만 말이다.

저 문구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 중 기억의 가치를 폄하하는 자들이 종종 보인다. 여우가 자신이 먹지 못하는 포도를 보고 괜히 상했을 거라고 하는 느낌이랄까.

글쓰기와 기록은 거기에 임하는 자세에 따라 완전히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기억을 신포도로 바라보는 사람은 글쓰기는 하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기록은 하지 못한다.




글쓰기를 한자로 표현하면 기록이 아니라 '필기'다. 필기는 [받아 적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수단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필기만큼 '목적인 척'을 잘하는 게 없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 난 항상 뭔가를 듣고 무호흡 필기를 조진 다음 그것만으로 만족감을 느꼈다. 목적을 달성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 만족감은 개미귀신과도 같아서, 나로 하여금 필기한 걸 곱씹기도 전에 또다시 다른 걸 찾아 듣게 만들었다. 필기가 기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 개미지옥에서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기록은 무엇일까? '기'는 적는 것일테니 뒤에 오는 '록'에 주목해보자.


'기록할 록(錄)'자를 잘 보면 두 개의 한자로 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둘을 함께 직역하면 '쇠에 새긴다'가 된다.


다시 말해 기록이라는 건 쇠에 상처를 새기듯 비가역적인 성격을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쇠는 당연히 나 자신이어야 하고, 인생은 그 쇠에 새긴 상처를 하나의 획으로서 그려나가는 작품이어야 한다.


결국 기록은 [상처를 새기는 것]이 된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상처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 것이다. 육체가 발전하는 원리의 핵심이 바로 상처이다. 운동은 육체에 상처를 새기는 기록인 것이다.



그래서, 기록다운 기록을 할 수 있는 원천이 어디냐 하면 이제 여기서 '기억'이 등장한다. 역시 뒤에 오는 '억'에 주목해보자.


기억의 '억'은 '생각할 억(憶)'자다. 한자를 뜯어보면 생각(憶)이라는 건 마음(心)과 뜻(意)이 만나 이뤄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뜻(意)을 파헤쳐보면 음(音)과 심(心)이 만나 뜻이 된다. 즉, 소리와 마음이 만나 뜻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 내 마음이 무언가를 헤아리는 소리가 바로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뜻을 드높이기 위해선 논리를 따지기 전에 그저 내면의 소리를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뜻과 마음이 만난 게 바로 '억'이다. 따라서 '억'에는 사람의 마음(心)이 두 개나 존재하는 셈이다. 우리는 나무가 두 개면 숲(林)이 되는 걸 알고 있다. 결국 기억이라는 건 마음과 마음이 만나 형성되는 [생각의 숲]이다.



자신의 인생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면,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기억을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기록은 철저히 기억으로 하는 것이고, 이걸 역사라고 부르며, 그 역사는 다시 기록으로 기억된다. 잊고 싶은 기억을 왜 흑'역사'라고 부르겠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기록은 상처와도 같다. 그리고 상처는 기억으로부터 생겨난다. 남의 기억이 아니라 온전히 내 기억일 때 진정한 의미의 기록을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문득 기자에 뜻을 두고 있는 내 친구가 떠올랐다.


이 친구는 내가 본 사람 중 기록에 재능이 가장 출중한 녀석이다. 중학생 때부터 필기를 정말 깔끔하게 잘했는데, 신기한 건 그게 다 기억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내내 ufc로 치면 p4p 랭킹, 즉 자기 체급 장악력이 압도적으로 1위였다.


얼마 전 이 친구가 내게 생일선물로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책 속 장소로 현장 연구를 간다는 소식을 내게 전했다. 기록을 위한 기억의 가치를 그냥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하고 활용하면 그대로 삶이 우상향한다는 걸 보여주는 친구라서 배울 점도 많고 참 고맙다.


나 역시 꾸준히 기억으로 기록하고, 기록으로 기억되는 삶을 그려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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