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에서 ‘베오그라드’까지 14시간의 비둘기호 여정
몬테네그로의 항구도시 ‘바르’에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까지는 총 523km다. 두 나라를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단연 소요시간 40분의 비행기다. 김포공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 시간이 한 시간이니, 40분이면 정말로 이륙하자마자 착륙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자차로 몬테네그로를 여행했기 때문에, 여행을 마친 후 차와 나를 싣고 베오그라드로 돌아오는 방법은 자동차와 기차였고, 오랜 운전에 지친 와중에 마침 오후 7시에 몬테네그로에서 출발하여 다음 날 아침 6시에 세르비아로 도착하는 밤기차가 있길래 기차를 타보기로 했다.
기차는 침대 3개가 포함된 객실과 차를 싣는 화물칸까지 합해서 약 150유로였고, 관광 열차가 아니어서 그런지 인터넷에도 탑승 후기가 거의 없어, 아무런 정보 없이 여행 출발 전 세르비아 여행사(Putovanja Wasteels)를 통해 미리 기차표를 예약했다.
몬테네그로의 항구도시 ‘바르’에 도착해서 처음 차에서 내렸을 때는 약간 무서웠다. 관광지에서도 몬테네그로를 여행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으니 종종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았는데, 하물며 여긴 관광지도 아니고 주민들 외에 사람도 별로 없고, 사람들은 내가 지나가고 나서도 고개를 돌려서 괜히 나를 주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물론 럭셔리 프리미엄 열차 여행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노후하고 생활밀착형인 기차역의 모습에, 부모님 모시고 왔는데 괜히 힘든 기차를 탄다고 한 것은 아닌지 근심 걱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차를 미리 열차에 싣고, 출발까지 남는 시간 동안 기찻길 바로 옆 노천 식당에서 몬테네그로 맥주 닉쉬츠코(Niksicko)를 마시며 사람 구경을 하고 있으니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민망해졌다. 사람들은 처음에 잠시 우리를 쳐다보는 듯 하다가, 이내 일말의 관심도 없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느라 바빴고, 무엇보다 가족 단위 승객이 많았다.
‘그래, 몬테네그로도 세르비아만큼 안전한 곳이었지.’
다행히 열차 안도 객실마다 분리가 되어 있어 코로나19 걱정도 한시름 덜었다.
내가 이 열차를 탄다고 하니 세르비아인 동료들은 모두 나를 말렸었다. 세르비아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외국인인 내가 이 나라의 좋은 것만 보기를 바라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동료들은 열차가 너무 느리고, 낡았고, 이 열차를 타면 진정한 세르비아(real Serbia)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열차는 많은 구간에서 시속 30km 정도로 천천히 달렸고, 무엇보다 객실 안에 에어컨이 없어 가는 내내 창문을 열고 있어야 했고, 내부가 더럽진 않았지만 다소 낡긴 했다. 아마도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사람과 물류를 싣고 쌩쌩 달렸을 열차는, 이제 기차와 레일이 모두 노후하여 쇳소리를 내며 덜컹덜컹 달렸다. 한 동료는 나에게 몬테네그로에 바르-베오그라드 구간 레일을 정비할 수 있는 기술자가 12명 밖에 없어, 노후한 레일을 정비하지 못해서 기차 속도가 느린 것이라고 했다.
해도 길었던 7월 말이라 출발하고 나서도 한참동안 객실 안이 찜통 더위였지만, 기차가 달리고 나니 그나마 창문에서 바람이 들어와 그제서야 창밖을 내다볼 여유가 생겼다.
국경을 넘었기 때문에 여권 검사는 밤 12시경 몬테네그로를 빠져나갈 때 한 번, 새벽 2시경 세르비아로 들어올 때 한 번, 총 두 번 했다. 기차에서 내리는 것은 아니고, 세관 직원이 객실마다 방문해서 여권을 스캔했는데, 다행히도 유일한 동양인이었을 우리에게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다. 기차가 달리는동안 기내식은 없었고, 직원이 트롤리로 복도를 돌아다니며 맥주와 음료를 파는 것 같았다.
저녁 7시에 출발한 기차는 시간표상 일정보다 연착되어 베오그라드의 톱치데르(Topcider)역에 다음 날 아침 8시에 도착했고, 화물칸에서 15대의 차를 빼는 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려, 총 14시간이 소요되었다. 누군가 이 열차를 타게 된다면, ‘바르’역에서 차를 최대한 빨리 화물칸에 넣으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차를 빨리 넣을수록 빨리 뺄 수 있다. 우리 바로 앞 열 두번째로 차를 넣었을 차주인 아주머니는 답답한 일처리에 나에게 농담반 진담반, 자조적인 말투로 “이게 세르비아야! 세르비아에 온 걸 환영해!’라고 했다.
느리고 낡은 기차, 답답한 일처리. 단점과 불평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내게 이 기차를 추천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탔던 한여름만 피한다면) 한 번쯤 경험해볼만 하다고 대답할 것 같다. 무엇보다 느린 기차를 타고 지나치는 풍경들이 참 좋았다. 끝없는 산과 호수, 그리고 높은 산밑으로 뚫은 터널들. 또, 기차는 동네 바로 옆으로 달리기도 해서, 집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관광지가 아닌 사람 사는 곳은 어떤 모습인지, 주로 어떤 모양의 집에서 사는지, 마당에서는 무슨 동물을 키우는지, 사람들의 표정은 어떤지, 모두 볼 수 있었다. 천혜의 자연환경 뭐 이런건 아니지만, 동료 말마따나 침대에 누워서 진정한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를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이 기차를 또 타겠냐고 물어보면, 글쎄. 한 번 경험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