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틴 음악 앨범을 샀다. 아주 행복하다. 기다리는 그 이틀 동안 설렜다. 세븐틴을 좋아하냐고? 전혀 아니다. 세븐틴이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히트곡은 뭐가 있는지, 멤버는 몇 명인지 하나도 모른다. 그런데도 설레고 행복한 이유는, 아들을 위한 소비였기 때문이다.
아이돌 그룹은 뭐가 있는지, 노래는 어떤 걸 불렀는지 관심이 전혀 없던 아들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투어스라고 했던가?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를 부른 그룹이라던데 그 노래를 그렇게 즐겨 부르더니 이내 시들해졌다. 큰 관심이 없던 아이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포토카드가 뭐가 있는데 가격은 얼마고 멤버는 몇 명인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해 준다. 히트곡을 하나씩 들려주며 제목을 맞혀 보라는데 원, 알 수가 있어야지. 몰라서 대답 못 하는 엄마를 보며 박장대소하며 제목을 알려주는 그 당당한 표정에서 ‘아, 이번엔 제대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구나.’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엄마 내가 좋아하는 멤버이름이 00인데, 이 멤버의 포토카드를 갖고 싶거든. 그런데 세 장에 만오천 원이나 한데. 너무 비싼 거 같지 않아? 당근에서 좀 찾아볼까?”
“맑음아. 네가 갖고 싶으면 엄마가 사 줄 수 있어. 사줄까?”
“아니야 엄마, 내가 좀 더 생각해 보고 진짜 사고 싶으면 다시 말해줄게.”
며칠 뒤, “엄마, 세븐틴 앨범을 사면 그 안에 포토카드랑 랜덤카드가 들어있데. 앨범 시디도 두 장이라고 하더라.”
직접적으로 ‘갖고 싶어요’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아들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원한다는 것을.
“맑음아. 그거 갖고 싶어? 그럼 엄마가 사줄게.”
“아냐 엄마. 내가 좋아하는 멤버가 인기가 좀 있어서 다른 멤버 포토카드보다 좀 비싸. 무슨 시디가 이만오천 원이나 하는 거야? 너무 비싸지 않아?”
“비싸도 엄마가 사줄 수 있어. 네가 본 사이트 링크 엄마한테 보내줘 봐.”
“아냐 엄마. 내가 용돈 모아서 그때 살게. 내가 모아서 사야 좀 더 소중히 여기고 더 아끼게 되는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들의 표정을 보고 말투를 들으면 알 수 있었다. 격하게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아들이 원하는 앨범을 알아내서 그 자리에서 결제를 했다. 환하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엄마.”라고 말하는 아들을 보며, 행복했다. 배송이 시작됐는지, 도착은 언제 하는지 매일 학교 다녀오면 물어보는 아들 덕분에 나까지 덩달아 기다리는 시간이 설레고 기다려졌다. 택배상자를 뜯는 그 순간 느껴지는 희열이 있지 않던가. 온전히 아들이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얌전히 아들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밑에 두 동생들과 달리 큰 아이는 본인이 원하는 것이 있어도 쉽게 사달라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작년 가을, 사이클 자전거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다. 아빠가 사주겠노라 말을 했는데도 극구 거부하더니 본인의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계절이 바뀌고 나서야 자전거를 손에 넣었다. 용돈을 모으고 모았는데도 조금 부족한 일정 부분의 돈만 부모의 도움을 받고 나서 얻게 된 자전거.
집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인데, 1층에 이미 다른 자전거들로 꽉 차 있기도 하고 행여 누가 가져갈까 봐 무거운 자전거를 들고 집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며 매일 쓸고 닦고 있다. 본인의 돈으로 사서 더 애정이 가고 소중하다는 아들. 그런 아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특하면서도 짠한 마음이 든다.
몇 년 전, 아들이 진지하게 남편에게 물어봤다.
“아빠, 아빠는 왜 돈을 많이 못 버는 직업을 택했어?”
그 말을 하는 아이에게 어떠한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소명이 있어서, 부르심이 있어서 라는 두리뭉실한 말로 아이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가정의 경제적 상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래서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아들의 소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린이날, 생일날 때에 맞춰 본인이 원하는 것을 몇 달 전부터 말하는 막내와 달리 큰아이는 원하는 것을 말하는 일이 거의 없다. 친구들과 놀러 갈 때도 돈을 함부로 쓰거나 하는 법이 없다.
“맑음아. 친구들이랑 놀러 가면 이것저것 많이 사고 싶고 할 텐데 왜 이렇게 조금만 썼어?”
“엄마, 난 현명한 소비가 뭔지 학교에서 배웠잖아. 꼭 필요한지 아닌지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살 게 그렇게 많지 않아.”
이은경 선생님의 <다정한 관찰자>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욕심 많고 혈기 넘치는 엄마인 내가 애를 달달 볶아가며 성적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을 게 뻔해서, 그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도록 브레이크를 걸어준 고마운 존재가 바로 느리고 아픈 둘째였던 것이다. 둘째가 첫째의 덕을 보고 살 거라는 생각만 했지, 실은 첫째가 둘째 덕에 이만큼 멀쩡하게 자라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보 엄마였다. -다정한 관찰자 p.101-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어오는 직업을 가진 아빠가 아니지만, 부유한 가정형편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아들은 나름의 경제관념을 세우고 현명한 소비인지 아닌지를 생각한다. 절제를 배우고 인내를 배우고 원하는 소비를 했을 때 느껴지는 짜릿한 기쁨과 쾌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절약하며 적은 돈도 함부로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으는 아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플 때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 물질적 결핍이 아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가 되어줄거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들의 현명한 소비가 가끔은 나에게 잔소리가 되어 돌아오는 때도 있지만.
“엄마, 가방 또 샀어? 엄마 가방이 이렇게나 많은데?”
맑음아, 롯데월드에 갔을 때 물이 가장 싸서 물을 사 먹었다는 너의 말을 들었을 때, 너는 진짜 그냥 물이 마시고 싶었는데 마침 물이 싸서 사 마셨을 수도 있었겠지만 엄마는 마음이 조금 아팠어. 아빠 엄마는 너에게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최대한 부족함 없이 키워보겠다고 했지만 쑥쑥 자라나는 너의 눈에도 보이는 부분이 있었겠지. 처음엔 괜히 속상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동생들에게 의젓하게 충고도 해주고 아빠와 같이 머리를 맞대고 경제용어를 논하는 모습을 볼 때 잘 크고 있구나 싶은 마음에 감사해. 앞으로도 지금처럼 쭉 마음과 생각이 건강한 아이로 자라주렴.
아, 그리고 가방은. 나 진짜 필요해서 산 거야. 열심히 너희를 먹이고 키우고 가르치는 엄마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