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깊이있는 찍먹을 위한! 영화 소스 디핑입니다.
영화 얘기보다 영화를 핑계로 그 내막에 있는 여러 가지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길 더 좋아하는 괴짜즈 디핑. 예고해 드렸던 대로, 오늘부터 2주간은 영화 <킹스맨>에 대한 소스를 준비했어요.
영화 <킹스맨> 첫 개봉 당시의 충격, 기억하시나요? 소위 B급 감성 영화가 메인스트림에 오르는 데에 포문을 연 흥행작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신나는 락음악을 BGM으로 리드미컬하게 전개되는 원테이크 싸움 아니 난투씬... 클라이막스를 경건하게 장식한 폭죽 놀이... 호불호는 다소 갈렸었지만, 착하디 착한 히어로물 일색이었던 할리우드 영화판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던 것은 분명했지요.
그치만 디핑이 감히 뽑아보건대... 만만찮게 화제되었던 점이 하나 더 있었거든요. 그것은 바로, 아빠뻘 콜린 퍼스 아저씨의 죽지도 않은 수트핏. 쓰리피스 더블버튼 수트를 꽉꽉 채워입고 "Manners, maketh, man." 명대사 작렬했던 신사의 품격에 감명받아 (농담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영국의 신사(젠틀맨) 문화를 둘러싼, 역사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영국 신사 문화의 기원, 젠트리
여전히 남아있는 계급CLASS
CLASS가 다른 셜록과 찰스 자비에
영국 문화 내 고유명사로서의 신사, 즉 젠틀맨(Gentleman)은 중세 후기 옛 잉글랜드 왕국에 존재했던 젠트리(Gentry)라는 사회계층에서 파생된 언어입니다. 젠트리란 토지와 같이 가문이 소유한 자본력을 기반으로 자리잡은 지방의 신흥 지주 계층이었는데요. 신분 세습이 아닌 재력과 학력을 통해 가문 내에서 사회적으로 전해져 온 것이 특징입니다.
✔ 왜 세습이 안 된다는 거지?
왜냐면... 젠트리는 엄연히는 법적으로 인정받는 신분이나 계급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여기에는 유럽 내륙과 달리 다소 특이한 세습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제도의 특성이 작용합니다.
중세 후기와 근대 무렵 잉글랜드 왕국은 귀족 가문의 장남에게만 부모의 신분을 세습했어요. 따라서 같은 귀족 집안 형제자매여도 차남과 딸들의 경우 법률적 신분은 평민과 같았습니다. 뫄뫄공작네 아들, 솨솨백작네 딸 정도로 부르며 대우해 주긴 했지만 동일한 작위는 맏형에게만 상속되었다는 뜻이에요.
그치만 법률적인 공인이 없었다는 거고, 실제 사회에서는 여전히 공고한 지배계급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신분 특권은 없지만 가문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바탕으로 지주 노릇을 하면서(일단 자본소득을 확보) 마찬가지로 가문의 지원을 통해 유수의 사립학교에 진학, 교양과 학식을 기반으로 법조계나 학계, 금융계와 같은 고소득 직업에 종사하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어요(약간의 근로소득을 곁들인...).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사회적 신분을 귀족과 평민 사이, 유산계층이라는 또 다른 중간 아닌 중간계급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중간 계층이 바로! 젠트리예요. 이거... 현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죠?
잘 이해하셨어요. 젠트리와 부르주아의 비슷한 점은 부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형성하고 유지한 과정적인 측면이고요. 다른 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출발점이겠죠. 영국의 젠트리는 귀족을 친인척으로 두고 있기에 부가 막대하지 않아도 어느정도 사회적인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계층이지요(몰락한 귀족도 어쨌든 귀족 대접을 해 주는 것처럼요). 그리고 그 사회적 대우를 유지하기 위해 전개하는 여러 경제활동들, 직업을 갖고 사업을 확장하는 등의 근간이 되는 부는 가문에서 대대로 상속받는 토지 등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프랑스의 부르주아는 태생 자체가 엄연한 평민 계급이죠. 상공업 등에서 성공하여 몇 세대 내에서 축적한 스스로의 자본이 유산계층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비유하자면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르주아 하면 떠오르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벼락부자✨ 모습이 우리 머릿속에 자리잡은 데에는 사실 그 유명한 칼 마르크스의 공이 커요. 무겁고 중요한 문제니만큼,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디핑에서 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기를!
이처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젠트리라는 계층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꾸준히 패권을 유지하여, 오히려 무늬만 남은 왕족과 귀족 세력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요. 해당 계층의 형성은 영국의 자본주의와 사회 발전의 근간을 다지기도 했고요. 경제 뿐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큰 각인을 남겨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대표적인 각인 중 하나가 바로 영화 <킹스맨>에서 잊을만 하면 언급되는 젠틀맨이라는 개념이에요. 시대가 흘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견고해지면서 젠트리가 가진 계급적 개념은 희석되었고, 여기서 파생되어 변화한 젠틀맨이라는 단어가 귀족과 영국 내 상류 계층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학식과 품위를 갖춘, 교양있고 예의 바른 남성'을 지칭하는 일상용어이자 보통명사처럼 쓰이기에 이르렀어요.
디핑 TMI.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용어 아시죠? 이것도 바로 오늘 알아본 젠트리에서 유래한 말이예요. 처음에는 낙후된 구 도심 지역에 외부인과 돈이 유입되어 상권이 형성되고 활성화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개발된 지역에 고급 주택과 대형 상업시설이 들어오며 임대료가 급상승하면서 지역의 정체성이 상실되고 결과적으로는 영세 상인들과 원주민들이 기존 거주지와 상권에서 밀려나는 인구 이동 현상을 비판적으로 짚고 있습니다.
영국 사회에 남아있는 젠트리의 흔적, 마냥 신사적인 것만 있진 않아요. 영국은 선진국 중 몇 안되게 현대에도 군주제와 귀족 신분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이며, 따라서 여전히 사회적 계급과 계층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오늘의 소스 주 재료인 영화 <킹스맨>에서 이러한 영국의 현실을 꽤 직접적으로 그려냈어요. 킹스맨이 되려면 신사답게 굴어야 한다며, 야구점퍼만 입고 다니던 주인공 에그시(테런 에저튼 분)를 양장점에 데려가 생애 첫 양복을 맞춰주는(물론 무기도 줬습니다) 도입부터가 굉장히 상징적이고요. 하위 계급인 에그시가 훈련장에 들어오자 어느 학교 출신이야? 옥스포드? 캠브릿지? 하며 조롱 섞인 물음을 던지는 귀족 자제들의 모습에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묘사됩니다.
✔ 영국의 계급CLASS 문화
영국의 계급 문화는 앞서 살펴보았듯 오랜 역사에 걸쳐서 사회적, 관습적으로 형성된 개념입니다. 단순히 상류층과 중산층, 빈곤층과 같이 소득의 격차에 따라 계층이 나뉘는 것이 아니고요. 봉건사회에서 그랬듯 전통적인 '문화의 뿌리'의 차이에 따라 사회적 계급(Class)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채로 나뉘는 것이에요.
(왕족 등 최상위 귀족인 Royalty는 빼고) 일반 국민들의 계급 층위는 아래 그림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최상류층에 해당하는 Upper Class와 그 아래 빵빵한 중산층(계층이 아닌 신분인 만큼 우리나라 중산층보단 훨씬 강한 개념!)인 Middle Class, 그리고 일반 서민 노동자 계급인 Working Class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계급 개념이 많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며, 영국인들 또한 당연히 의식적으로 서로의 계급을 면전에서 언급하진 않습니다. 직업 선택이나 계급간 교류에 있어서도 명시적으로는 차별을 두고 있지 않고요. (왜 이탤릭체로 표시했는지는 아래에서 설명할게요) 레터 도입에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수트 핏을 언급했지만, 영화 <킹스맨> 속 전형적인 Working Class로 묘사되는 에그시가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어엿한 젠틀맨이자 킹스맨 요원으로 거듭나는 먼치킨스러운 성장 과정은 배경이 되는 영국의 계급 문화를 현대적으로, 또 진보적으로 꼬집으며 그려낸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영화는 영화이고요. 여전히 그 인식이 남아있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입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다른 영국인을 만나면 사용하는 어휘의 뉘앙스나 제스처, 복식 등을 통하여 5분 내로 상대방의 계급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그 일종의 계급적 유리 천장이, 다소 의외의 직업군에 뚜렷이 남아있다고 하는데요. 다음 파트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분들을 모셔다가 더 이야기해볼게요.
1) 우리가 흔히 영국 드라마에서 들어본 장황한 말투와 악센트는 R.P.(Received Pronunciation) 혹은 Posh라고 불리는 것으로, 중상류층 계급에서 주로 쓰는 억양이라고 합니다. 대중매체에서 그리는 것처럼 뚜렷하게 R.P.를 사용하는 사람은 사실상 영국 내 중상류층 중에서도 3% 남짓에 지나지 않는데요. 그럼에도 우리가 특유의 영국 발음에 익숙한 까닭은 영국 배우의 상당수가 중상류층 계급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배우가 된 후 영국 출신이라는 특징을 강조하기 위하여 Posh스럽게 악센트를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라는... 다소 씁쓸한 배경이 있습니다.
2) 그 밖에 사용하는 단어의 차이도 꽤 되는데요. 중상류층 계급의 경우 식사 코스의 후식을 통틀어서 푸딩(Pudding)이라고 불러요. 우리도 많이 쓰는 디저트(Dessert)는 미국 영어에서 쓰이며 전세계적으로 표준화되기 전까지는 본래 영국 하위 계급에서 쓰는 말이었다고 해요. 또한 오늘의 주제 영화 <킹스맨>에서는 노동자 계급인 에그시가 킹스맨 요원 훈련에서 만난 찰리와 록시가 쓰는 Lavatory(화장실)라는 단어를 못 알아듣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Working Class 출신으로 성공을 거둔 신화적 사례로, 대중음악의 각 세대를 대표하는 락커 존 레논과 노엘 갤러거가 있어요. 반면 상대적으로 배우 중에는 Upper-Middle Class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400명이 넘는 영국의 배우들을 조사한 결과 스스로를 Middle Class라고 답한 사람이 73%가 넘었다고 해요. 이는 같은 예술 계통이어도 관습적으로 대중음악보다 연기를 보다 엘리트적인 재능으로 여기고 어릴 때부터 체계적 코스를 밟으며 예술과 관련 학문들에 대한 제반 지식을 교육해내고자 하는 영국의 문화적 특성 탓에 그렇답니다. 실제로 영국 전체 인구 중 사립학교를 졸업한 사람의 비율은 7%에 불과한데, 오스카를 수상한 영국 배우 중 무려 67%가 사립학교 출신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신비한 동물사전>의 에디 레드메인은 이튼 스쿨을 졸업한 금수저로 유명하고요. <셜록>의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장미전쟁 당시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리처드 3세의 먼 후손이기도 하고, 국내 인지도는 좀 떨어지지만 만만찮은 사립학교인 해로우 스쿨을 나왔습니다. <셜록>을 찍을 때 왓슨 역이었던 마틴 프리먼이 그 사실을 알고 "오 너 f**king 호그와트 나왔냐?"라고 농담했대요. (디핑 주: 호그와트의 촬영지가 바로 그 학교!)
그렇다면 Working Class 출신의 배우는 없냐? 물론 있습니다. 대표적인 명 배우로 게리 올드만과 리암 니슨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연기 생활은 꽤 녹록치 않았다고 해요. 두 배우는 영국 영화계보다는 할리우드에서 먼저 성공을 거둔 케이스이고, 현재까지도 할리우드 영화에 훨씬 많이 출연하고 있는데요. 그게 다 영국 배우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계급 천장에 가로막혀서 출연료를 삭감당하고, 들어오는 배역의 양과 질에서도 제약을 겪는 등... 여러모로 활발한 연기 활동을 펼치기 어려워서였다네요.
그리고 좀 더 젊은 배우도 있죠. 바로 영화 <원티드>로 유명세를 타고,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프로페서 X(찰스 자비에)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배우! 제임스 맥어보이입니다.
그는 특히 어려운 성장 환경을 겪은 것으로 유명해요. 스코틀랜드의 거친 빈민가 드럼채플(Drumchapel) 출신으로, 대낮에도 마약 거래가 버젓이 이루어질 정도로 치안이 위험했던 탓에 16살이 넘기 전까지 혼자서 집 밖을 나가본 적 없다고 합니다. 어려움을 딛고 배우로서 성공한 그는 모교에 장학재단을 만들어 저소득층 배우 지망생을 지원하는 등, 예술을 배울 기회의 평등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고 하네요.
관련해서 인상적인 발언을 남긴 BBC 인터뷰 영상이 있어, 풀 영상 링크와 함께 짤막하게 번역해서 전해드리며... 오늘의 소스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2016년 BBC One Show에 출연한 인터뷰 영상
제가 (Posh 억양을 구사하는) 상류층 배우들이 많아지는 것을 걱정하는 건 아니에요. 그게 업계에 아주 좋은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걸 걱정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거의 모든 배우들이 Posh한 배우라는 건 우리의 교육체계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나타내죠. 제가 우려하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는 정부와 나라입니다. 연기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예술 교육을 포함해서요. 왜냐하면 예술은 아이들의 시야를 확장시켜 주고, '이 정도면 충분해' 라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들이 더 멀리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보면 이 사회를 고착시키고 계층 간의 유동성을 줄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예술을 없애는 것 아닐까요.
(중략) 말했듯이 연기가 엘리트적인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많은 신인 배우들이 사립학교 출신이에요. 왜냐면 다른 일반 학교들은 예술 교육에 투자할 시간과 돈이 충분하지 않거든요. 그러니 예술에 접근할 기회가 없는 거예요. 조금은 감성적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계층의 변화를 원하고, 당신의 아이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그들에게 예술을 접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할 거라고 믿어요.
오늘의 디핑 소스는 여기까지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디핑을 구독해 주세요. 참고로 저희는 뉴스레터도 함께 하고 있답니다.
카카오 뷰를 통해서도 새 글 소식을 받아 보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