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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핑 Jan 22. 2022

쫄지 말고 대충 쏴 : <최종병기 활> 궁술편

 안녕하세요, 깊이있는 찍먹을 위한! 영화 소스 디핑입니다. 


 영화 얘기보다 영화를 핑계로 그 내막에 있는 여러 가지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길 더 좋아하는 괴짜즈 디핑. 이번 주에는 영화 <최종병기 활>에 대한 소스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2주에 걸쳐 전해드릴 주객전도 디핑 소스 가운데, 이번주는 영화에 등장하는 을 비롯한 우리나라 궁술에 대한 깨알같은 역사 이야기를 준비해봤어요.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오늘의 부제목,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영화 <최종병기 활>에 나오는 대사로, 개봉한지 꽤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대중매체에서 회자되곤 하는 명대사입니다. 그저 영화 속 이야기 같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명장면이 종종 연출되고는 해요. 명실상부 최강의 자리에 있는 우리나라 양궁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의 소스를 시작합니다.


2016 리우 올림픽, 강한 바람을 보란듯이 극복하고 금메달을 따낸 장혜진 선수의 여자 개인전 결승!

2012 런던 올림픽, 물이 튈 정도로 강한 빗줄기 속에서 활시위를 당긴 여자 단체전 결승!!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나라 양궁 선수들은 모든 악조건과 악천후를 극복하며 꿋꿋한 연승 행진을 달려왔어요. 올해 도쿄 올림픽에서도 여자 단체전 9연패, 남자 단체전 2연패, 남녀 혼성 최초 금메달...에 더하여 안산 선수의 양궁종목 최초 3관왕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며! 양궁 강대국의 이름을 이어왔습니다. "역시 주몽의 후예다워!" 같은 국뽕 멘트, 솔직히 안 외칠 수가 없었잖아요 


 물론 양궁이 국제무대에서 큰 기록을 세울 수 있는 데에는 대기업의 전폭적인 후원과, 협회와 선수 선발의 투명성이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도 익히 알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활이 아주 중요한 무기로 쓰여왔고, 주변국으로부터도 궁술 실력을 인정받아왔다는 사실을 보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지금의 활약들이 전혀 관련 없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나라 활과 궁술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가져와 봤습니다.


우리의 활쏘기, 국궁

역사 속 활이야기

활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



우리의 활쏘기, 국궁

문화제청 

 국궁...? 좀 낯설죠? 국궁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활과 궁술을 양궁과 비교하기 위해 후대에 붙인 이름입니다. 조선 시대까지는 훨씬 더 많은 종류의 활과 화살이 있었는데요. 그 중 지금까지 이어져 민간에서도 사용하는 것은 각궁입니다. 아쉽게도 박물관에 남아있는 것들은 대부분 연습용 각궁이고요, 실제 전쟁에서 사용하던 각궁은 전승이 끊겼다고 해요.


 각궁의 역사는 고구려까지 올라갑니다. 고구려는 다른 나라의 활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물소 뿔, 소의 힘줄 등을 사용해 탄력성을 극대화한 활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특히 물소 뿔을 주 재료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각궁(角, 뿔 각)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어요.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활은 유명했는데, 고조선 시대부터 한국인의 근간이 된 민족을 칭하던 맥(貊)자를 붙여 맥궁이라 부르며 인정해 주었다고 하네요.



✔ 국궁 vs 양궁, 뭐가 다르지?


 국궁과 양궁의 주된 차이는 조준기 사용 여부입니다. 양궁은 조준기를 사용하지만, 국궁은 조준기 부착이 불가합니다. 사거리에서도 차이가 나는데요. 양궁의 사거리는 90m로, 우리도 잘 아는 것처럼 과녁판에 화살이 맞는 위치에 따라 점수가 달라지죠. 반면 국궁은 145m 거리에서 활을 쏘고, 과녁판 아무 곳이든 맞히면 명중입니다. 그 외에도 활 쏠 때의 자세와 방식 등에서도 차이가 나요.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양궁은, 16세기 영국에서 오락용 활쏘기 대회의 형태로 시작했어요. 이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파되어 스포츠의 한 종목이 되었습니다. 올림픽 경기 종목으로 최초 채택된 것은 1900년이었고요. 몇 차례 제외되었다가 다시 채택되는 과정을 거쳐 1972년 20회 뮌헨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4년 미국 LA 올림픽에서 서향순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27개의 금메달을 양궁에서 가져왔답니다.



✔ 최종병기 화살, 편전


 우리나라 활의 근간에 대해 짧게 살펴봤으니 이제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볼게요. <최종병기 활> 속 화살은, 당시에 실존하던 것이었을까요? 정답은 YES! 어떤 화살이었는지 디핑이 직접 찾아봤어요.


최종병기 활 스틸컷

 편전, 또는 순우리말로 애기살로 불리는 이 화살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 남이(박해일 분)가 쏘는 무기로 잠시 등장하는데요. 사실 그 위상은... 왜구와 북방 민족들이 모두 두려워할 정도로, 조선 시대의 핵심적인 무기였다고 해요. 무과시험에서 역시, 편전을 쏘는 궁술이 대표적인 평가 항목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사진 속 편전과 일반 화살의 가장 큰 차이점, 자세히 보신다면 여러분도 눈치채실 텐데요. 바로 화살의 길이가 보통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짧은 화살이라는 점이에요. 길이가 짧아 보조 기구인 통아(긴 대)를 거쳐 화살이 발사되는데, 발사 후 사거리가 더 늘어나고 관통력이 좋아집니다. 갑옷이나 투구를 꿰뚫을 정도였다고 해요. 또한 짧은 화살이다 보니 비행궤적을 보기가 어렵고, 화살을 쏴도 통아가 남아있기 때문에 적들이 방심하는 효과도 있었어요.


 영화 <최종병기 활>은 사극영화로서 앞서 말씀드린 편전의 묘사를 비롯, 역사적 고증이 비교적 잘 된 것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영화이니까요, 100% 완벽히 할 순 없으니... 다소 아쉬운 부분들도 있었죠. 잘 정리된 기사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사극영화 중 최고의 작품... 그러나 고증은 2% 부족했다] 기사 자세히 보기



역사 속 활이야기


왜적들은 중국의 창법, 조선의 편전, 일본의 조총이 천하제일이라고 항상 말했다.

「지봉유설」에 실린 내용으로, 일본인들이 중국의 창술, 조선의 활과 화살 그리고 일본의 조총을 나라별 대표 무기로 뽑았다는 기록입니다. 과거 조상들은 지리적, 군사적 이유로 활을 주요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전술에서 활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자연스레 인재 등용에서도 궁술 실력을 보게 되기도 했고요.


 이렇듯 우리나라 활의 위력과 선조들의 활쏘기 실력에 대한 기록들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쭉 이어져 옵니다. 찬찬히 살펴볼까요? 



✔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활의 역사


고구려

매일경제

 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죠. 바로 고구려의 동명성왕, 주몽입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와 활쏘기를 함께 익혔으며, 일반에까지 사풍이 퍼졌다", "신분이 어떻든 총각은 밤낮으로 책을 읽고 궁술을 늘렸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진 속 무용총 수렵도 고분벽화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고구려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뒤쪽의 사냥감을 잡기 위하여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완전히 뒤로 젖혀서 활을 쏘는 모습도 그려져 있죠. 이러한 기법을 파르티안 사법(샷)이라고 합니다.  


신라

「수서」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해마다 한가위 잔치 끝에 관인들이 활을 쏘아 말과 베를 상으로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신라는 제 38대 원성왕(785~798년 재위) 때에 처음으로 독서삼품과를 실시, 학문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를 두고 「삼국사기」에서는 "전일엔 궁술로서 인물을 선발하더니 이때 이르러 개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원성왕 이전까지는 오직 활 솜씨에 따라서 인재를 선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두산백과

 신라의 대표적인 활은 입니다. 노는 전국시대에 등장한 무기로, 기계식 화살이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상대적으로 농민이 많았던 신라에서는 궁사를 육성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와 당나라 기병을 상대하기 위하여 다른 활보다 배우기가 쉬운 를 주 무기로 사용했어요.


 사진 속 무기는 상자노라고 부르는 것으로, 평평한 선반같은 상자 조각 위에 설치된 대형 무기입니다. 이처럼 신라에서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노를 개발하고 부대를 만들어 실제 전투에 활용하였습니다. 삼국 통일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나당 전쟁(문무왕 15년), 기억나시나요? 당시 주요 전투였던 매소성 전투에서 20만 당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데에도 노 부대의 역할이 컸다고 합니다.


백제

 고구려와 같은 부여 계통의 후손인 백제에도 활과 관련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역사서 「삼국사기」에서 깨알같은 백제 왕들의 활쏘기 실력을 몇몇 찾아볼 수 있었어요.


비류왕 : 궁궐 서편에 사대를 설치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백성을 모아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활쏘기를 했어요.

고이왕 : 강화도에서 손수 사슴 40마리를 쏘아 맞혔다고 해요.

아신왕 : 도성내의 백성(都人)들을 모아 활쏘기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네요.

                                                            

고려

 고려는 무보다 문을 중시한 국가이지만, 무(武)에서 특히 을 중요시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활쏘기를 익히면 군인 혹은 귀족의 사병이 되어서 무신으로 출세할 수 있었고요. 왕과 문인들도 심신과 인격 수련의 한 방법으로서 궁술 연마를 중히 여기었다고 합니다. 활쏘기에 능했던 예종, 의종을 비롯한 고려의 여러 왕들은 활을 잘 쏘는 신하들에게 상을 주며 심신의 수련을 권장하곤 했습니다.


조선

 어렸을 때 <삼국지> 같은 전략 게임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역사적 고증이나 전투 상성 구현에 있어서 굉장히 세밀하게 만들어진 게임이거든요. (그게 뭔데 디핑아...) 그 때 얻었던 깨알 지식이 있어요. 바로 말 타는 기병은 활 쏘는 궁병에게 약하다! 는 사실입니다. 조선군은 북방 기마민족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궁술을 전력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전체 기병의 60% 가량을 활기병으로 편성했고요. 무인 선발시험 6과목 중, 전투능력과 직결되는 활쏘기 관련 과목을 4과목이나 두었다고도 합니다.


목전 : 화살촉 대신 나무를 사용하여 얼마나 멀리 화살을 보낼 수 있는가를 시험. 무과의 초시와 복시에 사용했어요.

철전 : 무쇠로 만든 화살을 통한 시험. 일반 화살에 비해 서너 배 정도 두껍고 크기 때문에, 일반적인 활쏘기 방식이 아닌 도약해서 쏘는 방식으로 시험을 보았어요.

편전(애기살) : 작고 짧은 화살을 이용한 시험.

기사 :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시험.


「대전후속록」에는 조선시대 군인들의 활쏘기 성적에 따른 포상과 처벌 규정이 나와있습니다. 활쏘기 성적이 나쁘면 진급과 포상의 기준이 되는 근무 인정 일수를 삭감하였고, 활쏘기 시험에 두 차례 불참할 경우 품계까지 강등하기도 했다네요.



✔ 민간에서도 즐긴 활쏘기 

김홍도 「활쏘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군사적으로 중요한 무기였던 . 하지만 전투에만 쓰였던 것은 아니에요. 활쏘기로 하여금 심신을 단련하고 정신을 훈련하는 측면 또한 강조되어 선비들도 일상에서 궁술을 연마하고 연습하곤 했는데요. 임진왜란 이후 조총의 등장으로 활과 이를 이용한 전법들은 다소 쇠퇴하였지만, 오히려 민간에서는 놀이 형태로 더욱 대중화되었다고 합니다.


 일반 백성에게 활쏘기를 장려하기 시작한 임금은 조선의 선조입니다. 이후 전국 각지에 민간 사정이 건립되기 시작했는데요. (사정이란? 활 쏘는 사람들이 무예 수련을 위하여 세운 정자!) 17-18세기에 전성기를 이룬 활쏘기는 19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게 돼요. 이에 고종 황제가 전국적으로 활쏘기 문화를 권장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때 자신이 활을 쏘던 경희궁 활터에 민간사정인 황학정을 짓도록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이어져 온 활쏘기는 우리 민족만의 역사와 고유성을 인정받아, 2020년에 드디어! 국가무형문화재 제 142호로 지정되었다고 해요.

 

 자료를 조사하다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어요. 일제시대에 열렸던 궁술대회 중, 여성 부문에 기생들이 참여하며 대결을 펼쳤다는 내용입니다. 최근 도쿄 올림픽에서 대활약한 안산 선수를 비롯, 우리나라 여자 양궁 선수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자세한 내용 같이 볼까요?

한국 여성의 활쏘기 실력, 이미 100년 전부터 두각을 보였다는데? 기사 자세히 보기



활로 이름을 남긴 ✒ 사람들



✔ 주몽 다음가는 신궁, 태조 이성계


 우리는 아무래도 활 하면 주몽을 제일 먼저 떠올립니다. 주몽이 송양과의 활쏘기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어릴적 만화책이나 위인전에서 익히 보던 내용이었죠. 주몽 다음가는 신궁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인물, 바로 태조 이성계입니다. 얼마나 대단했기에 주몽과 함께 언급되는 걸까요? 여러 기록들을 찾아봤어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태조 이성계가 사용했던 활인 어궁구의 모습입니다. 보관 장소였던 함흥 본궁(이성계의 생가이자, 아들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후 머물던 곳)이 한국전쟁 이후 불에 타,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해요. �


이외에, 「용비어천가」, 「태조실록」, 「고려사」 등에 흥미로운 일화들이 있는데요:                


화살 한 발에 까치를 다섯마리 떨어뜨렸다.

고려 공민왕 재위 시절, 신하들을 불러놓고 80보(96m)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은 거울 10개를 맞히면 상으로 주겠다고 하자 자리에 있던 이성계가 모두 쏘아 맞추었다.

100보(120m) 밖 배나무에 달린 배 수십개를 보고 활로 쏴 맞추었다.

왜구가 쳐들어 오자 화살 50대를 쏘아 적군의 얼굴에 명중시켰다.


 정사와 야화를 오가는 기록인 만큼 어느정도 과장되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그의 실력을 높게 평가한 기록 또한 다수 존재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왕 띄워주기 만은 아닐 듯 싶습니다.



✔ 활로 적군을 죽인 승장, 김윤후 스님


활 한 자루를 들고 종횡무진 적진을 누비던 <최종병기 활> 속 남이(박해일 분)의 활약. 감탄이 절로 나오면서도, 사실은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일 거라 생각하셨죠.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도 실제로 남이와 같이 활 하나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오늘 디핑에서 소개할 인물은! 고려시대 승장 김윤후라는 분입니다.


처인성 전투도, 전쟁기념관 소장

 김윤후는 고려 고종 때의 승장으로, 대몽항쟁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인데요. 대표적으로 활약한 전투는 바로 역사 시간에 한번쯤 들어보셨을 처인성 전투입니다. 1232년 처인성(현재의 용인시 서남부 지역)에는 몽골의 2차 침략을 피해 많은 백성이 모여 있었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승려 김윤후가 처인성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통솔하여 전쟁을 치뤘고, 활을 쏘아 적장 살리타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철수하게 되었어요.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도 노비문서를 불태워 사기를 북돋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조정에서 관직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몽골의 고려 침입, 1차부터 무려 3차까지 있었다는데? 기사로 자세히 보기





        



오늘의 디핑 소스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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