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중에서
너무나도 매혹적인 여인의 노골적인 유혹 앞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지만, 몇 번 만나지 않은 남자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감옥도 마다하지 않는 남자.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지만 혼자가 되면 쓸쓸해지는 중년의 독신남자. 서두르는 법 없이 느긋하면서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필립 말로우의 모습이다.
필립 말로우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이다. 나이는 40대 초중반이고 1940년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다. 독신남에 그럭저럭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흔히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하드보일드란 사전적 정의로 ‘완숙한 달걀’이라는 뜻이며, 일반적으로 불필요한 수사(修辭를事 배제하고, 지극히 객관적인 시점에서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말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글을 읽으면서 전체 글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아침의 일과라든가, 커피를 만드는 과정이라든가, 점심을 먹으러 가는 장면이라든가 등등…. 나는 이런 것들이 글 전체의 전개에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것들로 인해 스토리의 전개가 다소 늘어진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런데 글을 다 읽었을 때는 그런 소소한, 일상적인 장면들이 인물을 더욱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진행되는 스토리는 촘촘한 그물이 되어 사건과 인물 간의 개연성을 높이고 사건의 단서들을 끌어올려 소설의 중반에서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 완벽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194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의 거리, 경찰들, 뒷골목, 범죄의 그림자를 느껴보고 싶다거나, 매력적인 탐정을 만나보고 싶다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이 적격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중에서
내 기분은 별과 별 사이의 공간처럼 공허했다. 집에 돌아오자 강한 칵테일을 만들고, 거실의 창문을 열고 그 앞에 서서, 로럴 캐니언 블루버드에서 땅울림처럼 들려오는 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아득히 반짝이고 있는 시가지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경찰차인지 소방차인지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완전한 정적 같은 순간은 거의 없다. 하루 24시간 내내 반드시 누군가가 도망하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체포하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