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빅셀의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중에서
나는 요즘 ‘그냥 듣기’가 필요하다.
목사님의 설교든, 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동네 아줌마의 이야기든. 말하는 그 사람을 판단해서 그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듣기’가 필요하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이해하고 설득하려고 하기보다 아이의 말을 그저 있는 그대로 ‘듣기’가 필요하다.
나는 요즘 ‘그냥 읽기’가 필요하다.
책의 의미를 생각하고 작가의 의도를 고려하며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그저 ‘읽기’가 필요하다.
책을 통해서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또는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작정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가 필요하다.
성급한 이해는 오해를, 섣부른 이해는 반감을 줄 수도 있다.
페터 빅셀의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중에서
몇 년 전, 어느 방학 캠프에서 지적장애인들을 위해 낭독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중략) 나는 그들보다 더 집중하여 듣는 청중을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정말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집중하여 듣는지, 낭독하는 내가 그들의 ‘듣기’를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 (중략) 낭독이 끝난 뒤 질문 시간이 되자, 어떤 남자가 나에게 내일 날씨를 물었다. 그는 나를 라디오 방송국 직원이라고, 그리고 라디오는 날씨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 글에 대해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전까지는 듣지 못한 질문들이었다.
“왜 그 이야기에 자동차는 나오지 않나요?”
“코끼리 이야기는 안 쓰나요?”
그러고는 자기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가 그들의 이야기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만 빼고는 내 이야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아주 다른 이야기들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이야기를 떠올린 능동적인 청중. 그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이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곳에서 청중에게 이해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듣기’란 ‘이해하기’보다 훨씬 단계가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대단찮은 청중일 것이다. 언제나 성급하게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