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며칠 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동생을 만났다. 제주도에서 15일간 지냈는데 가지고 갔던 차가 고장이 나서 제주도에서 수리를 맡기고 서울로 복귀해서 다시 차를 찾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서울 가는 길에 내가 사는 곳을 지나게 되니 잠깐 보자고 했다. 나는 아이들을 수영장에 가는 시간과 맞아떨어져 그 시간에 만나기로 했다. 그 친구는 서울 가는 길에 휴게소 들린다고 생각하고 만나는 것이니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1시간 정도였다.
“이야~ 제주도에서 15일이나 지내고, 부럽다~.”
내가 동생을 만나 처음 꺼낸 말이다.
“언니, 부러울 거 하나 없어. 나는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언니가 부럽다.”
싱글인 그 친구의 대답이다.
2년 만에 보는 것인데도 어제 만난 것 마냥 친근하다. 서로 속 깊은 고민도 툭 하고 털어냈다. 사는 모습은 틀려도 비슷한 질감의 고민을 하고 있으니 만나지 못한 공백의 시간이 무색하다. 서로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은근한 부러움이 있으니 서로의 고민을 괜찮다고 다독이는 말이 위로가 된다.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날 ‘그때 내가 만약 그랬다면,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假定) 법의 첫마디를 달고 머릿속의 생각이 비눗방울처럼 퐁퐁 생겨났다. 과거의 선택이 달라졌다면 내 삶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려졌을까?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는 역사를 우연의 연속으로 보는 이론에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에서 역사를 우연의 연속으로 보는 이론이 유행하게 된 것은 실존은 ‘어떠한 원인도, 이유도, 필연성도 가지지 않는다’―나는 샤르트르의 유명한 『존재와 무』를 인용하고 있다―고 설파하는 한 무리의 철학자들이 프랑스에서 등장하게 된 시기와 일치했다. (중략) 역사에서 운이나 우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들이 역사적 사건들의 봉우리가 아니라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집단이나 국민에게서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험성적이란 모두 운수 나름이라는 생각은 열등반에 배치될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유행하기 마련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의 생김새, 비야지드가 관절통에 걸린 것, 원숭이가 알렉산드로스 국왕을 물어 죽인 것, 레닌의 사망과 같은 일이 이러저러한 결과를 낳은 것은 사실이지만 장군들이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은 아름다운 여왕들에게 홀렸기 때문이라든가, 왕들이 애완원숭이들을 키우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든가 하는 것은 일반적인 명제로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원인은 다른 나라, 다른 시기, 다른 조건에서도 언젠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 유익한 일반적인 원인이 되며,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되고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키고 심화시키지만 우연적인 원인은 일반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결론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저자가 말하는 ‘역사’에 ‘인생’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면 과거의 내 삶에서 일어난 우연한 일들, 순간의 선택들, 만남들이 나의 인생을 바꿀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삶에 대한 무력감의 표현이고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그런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가치관, 환경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일어난 일이다. 나의 의지와 생각과는 전혀 무관한 우연의 일들이 나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냐? 이 바보야.’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에게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지적으로 게으르거나 지적인 활동력이 저급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으로 강연당시 저자의 나이는 69세였다. 노년에 그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면서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한 이유는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인류의 더 나은 진보에 대한 모든 전망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제해 버리는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절망의 조류”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작가의 정의는 인생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고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는 역사학자의 말은 현재의 나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역사가라면 미래에 관해서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미래를 뼛속 깊이 느끼는 사람이며 역사가는 ‘왜?’라는 질문에 더하여 ‘어디로?’라는 질문도 제기한다고 하는 작가의 역사관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나의 인생의 로드맵을 그려보게 한다.
사실을 바탕에 둔 끊임없는 탐구와 날카로운 지성을 겸비해야 하는 역사가의 사명과 역사라는 거대한 담론 앞에 나의 ‘인생’을 대입시킨다는 것에 겸연쩍은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역사도 사람의 인생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니 내 인생도 그 안에 넣어 이해해 보겠다는 내 생각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 않을까.
우리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의 대답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 자신의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며,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관해서 우리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더욱 폭넓은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가 된다. “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