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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만소 May 14. 2023

[13] 서른이 지나고서 깨달은 것들

컴포트존 멀리하기 마지막이야기

 그거 아시나요? 어렸을 때 시골에 가면, 사촌들과 동네 모르는 친구들과 하루종일 뛰어 놀다가 할머니 집 딱 들어와서 송글송글 맺어져 있는 땀을 닦고 주전자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실 때, 그것이 보리차였다는 걸 알고 코와 입으로 전부 뿜어내던 기억이요. 혹시 저만 가지고 있나요?

생수만 마시다가 보리차를 입에 댄 순간, 달짝지근한 음료수도 아니고 이상하게 비릿한 맛이 나던 그 보리차요. 냉장고를 열었을 때 생수와 갓 끓여서 넣어 둔 보리차가 있으면 당연 생수를 집어 들어 늘 선택받지 못했던 그 녀석이요.


 요즘 그 보리차가 너무 좋아요. 돈 주고도 사 마셔요. 아침에 레드불, 오전에 커피, 오후에 커피를 마시고 잔업할 때 보리차를 하나 사서 벌컥벌컥 마시며 일을 하죠. 20대에도 시시각각 변하는 입맛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보리차가 물보다 좋아지게 되는 걸 보니 참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구나 생각이 드네요.


 나이!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대요. 사람마다 출발선이 다르다였나? 이번에 찰스 3세가 왕이 되었잖아요. 그 사람 74살이에요. 74살이 되어서야 왕이 된 남자인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만 32세인 저는 아직 그 사람의 절반도 못 왔는 걸요. 언젠간 해리포터가 다니던 호그와트의 편지가 저한테도 올 날이 오겠죠.


 그러나 나이! 이 숫자에 불과한 녀석이 정말, 너무 정말 제 발목을 잡아요. 나이를 탈피해 무언가를 이룩한 사람들이 왜 대단하겠어요. 아무나 하지 못하니까, 인 것이죠. 제가 그래요. 저는 범인이에요. 일반 사람이죠. 일주일에 세 번은 야식으로 햄버거를 먹던 제가, 어느새 12시가 지나기만 하면 햄버거의 햄만 들어도 속이 더부룩해져요. 벌써 그런 나이인 것이에요.


 제가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저는 독일로 유학을 갔었죠. 그러나 2년도 지나지 않아서 돌아왔어요.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컸지만, 제일 무서웠던 것이 있거든요. 26살의 나이에 대학 1학년을 들어가서 언제 돈 벌고 언제 취직하지? 라는 생각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그게 무서웠거든요. 제 친구들이 취직하는 걸 보며 제가 1학년이었으니까요.


 전 편에서, 차를 샀다고 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였어요. 조금이라도 더 늙기 전에 좋은 차를 타보자라는 욕심이었죠. 어릴 때 별명이 애늙은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더 늙은이 같아요. 드라이브를 갈 때 외제차 옆에 꽂아두는 음료가 보리차니까요! 


 장난은 여기까지만 말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게요. 얼마 전, 회사에서 설계자격 시험이 있었어요. 저와 비슷한 기수는 대부분 가지고 있는 자격이죠. 그렇게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은- 즉 공부를 하면 딸 수는 있지만 공부를 안 한다면 절대 불가능한. 그런 난이도의 시험이었어요. 공부. 저는 머리가 참 좋았어요. 자랑으로 들리겠지만 전교 17등 정도로 꾸준히 학교를 다녔으니까요. 17등 정도에 왜 머리가 좋냐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텐데, 제가 중학교 2학년 이후로 책을 한 글자도 안 읽었거든요. 그러고 고등학교 때 전교권에서 놀았으니까 머리가 좋은 거죠.


 반면, 공부는 참 못했어요. 공부하려고 앉으면 산만해지고, 폰 꺼내고, 나가서 담배피우고, 피시방 가고, 다시 앉아서 제대로 해보려하면 잠들고... 공부를 정말 못했어요. 공부도 재능인 거 아시나요? 저는 재능이 정말 없었어요. 그런 제가, 설계자격 시험 공부를 하려고 하니, 될 턱이 있습니까. 마지막 공부가 중학교 2학년인데... 


 마찬가지로 폰 보고, 글 쓰고, 자고, 담배피고, 술이랑 공부하고 어질어질하지요. 물론 대외적으로는 변명거리가 있어요.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월 50시간을 잔업을 해요. 토요일에도 출근하고요. 공부할 시간이 어딨겠습니까...


 결과적으로는, 붙긴 했어요. 70점 합격에 68점이었는데 부분점수 받아서 72점으로요. 72점에 그렇게 기뻐하는 저는 인생에서 처음이었을 거예요. 너무 기뻐서 과장님 앞에서 울 뻔 했다니까요. 그런데 뒤돌아서 생각해보면, 참 찝찝해요 이게. 어렸을 때는 그래도 쓱 보면 모든 것이 쏙쏙 들어왔는데 요새는 하나를 담으려거든, 10개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에요. 


 외우는 건 잘해도 그 이상을 뻗어나가질 못해요. 신문물을 받아드리지 못하겠어요. 요즘 유행하는 AI도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말이에요. 


 영화 마틸다에서 이런 대사가 나와요. 마틸다는 5살 때 이미 남들은 서른이 되어서야 배우는 것들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을 돌보는 것이었다. 서른. 서른이 되면 세상은 한 번 꺾여요. 정말 무섭도록 말이죠. 찬란하기도 하고 피어오르기도 했던 이십 대가 끝났다는 기준이에요. 이제 앞으로는 현실 밖에 없고, 우리는 점점 늙어가고, 몸에 어딘가가 이상해지는. 그런 나이대에 접어든 것이죠.


 지금 이 생각도 어쩌면 40살이 되면 바뀔 지도 몰라요. 서른이 좋았다. 고요. 그치만 어쩌겠습니까. 지금 느끼는 저는 40살의 생각을 알 수 없는데. 저는 참으로도 현재에 충실했던 사람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러고 싶고요.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요. 그런데 매달 날아오는 세금 고지서에 적힌 160만원의 숫자를 보면, 그럴 수 없게 되는 것이 서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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