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홀라 May 12. 2022

콩치노 콩크리트,
음악의 양감이 가득 차는 공간

귀가 아닌 피부에 와닿는 선율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는 때.


이건 여기를 보충해야 하고, 저건 누구에게 메일로 공유해야 하고, 또 누구에겐 전화로 뭔가를 물어봐야 하고.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랑곳 않은 채 새 업무를 마구잡이로 던지는 팀장 덕분에 야근과 주말 출근에 절여져 피곤이 몰려오는 때.


그리고 보통 이럴 때는 몸만 피곤한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핀치에 몰린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아웅 대는 것도 꽤나 기 빨리는 일인데, 부탁을 받거나 부탁을 해야 하는 업무도 많다. 점심이라도 조용히 혼자 먹고 싶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고. 


요즘 제일 많이 하는 말? 뭐, 예전 같았으면 ‘욕 아닐까’ 하겠는데, 그 단계도 지난 것 같다. 아마 ‘지겹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하지 않을까. 그래. 정말이지 모든 것이 다 지겹다. 지난 몇 주간 야근과 주말을 한데 섞어 뻑뻑한 비빔밥처럼 억지로 씹어 삼켰다. 살려고. 돈 벌어야 하니까. 그렇게 켜켜이 스트레스를 쌓으며 들숨에 ‘아’, 날숨에 ‘지겨워’를 구겨 넣고 숨 쉬어왔다.


돌아온 주말에도 업무를 살펴볼 참이었는데, 하늘이 가혹할 만큼 파랬다. 가뜩이나 벚꽃은 절정이라(이날은 4월 9일 토요일이었다) 너무나도 억울했던 나머지 주말 잔업을 모두 놓아버렸다. 그리고 분홍빛으로 물든 여의도 윤중로를 뒤로 하고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으로 향했다. 질릴 때까지 음악에 파묻혀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음악의 양감이 가득 차는 공간

콩치노 콩크리트

      


음악과 휴식을 위해, 파주로


탄현면에는 헤이리 예술마을도 있다. 프로방스 마을도 있다. 둘 다 주말에 훌쩍 다녀오기는 좋은 곳이지만, 이번에 필자가 다녀온 곳은 그보다 덜 붐비는 곳이다. 둘보다는 혼자 가기에 더 좋은 곳, 커다랗고 높다란 건물 내벽을 타고 선율이 울려 퍼지면서 어우러지는 호젓한 공간, 콩치노 콩크리트(Concino concrete)엘 다녀왔다. 오픈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오디오필(Audiophile)들의 성지로 등극한 콩치노 콩크리트는 이번이 초행이다.

          

사실 필자는 오디오필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막귀’에 더 가깝다. 그냥 귀에 잘 들리면 그게 좋은 스피커고, 좋은 이어폰이겠거니 한다. 게다가 요즘은 어딜 가서 앉아있어도 BGM이 깔리니 굳이 음악 감상만을 위한 공간을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건축에 대한 특별한 인사이트나 전문성도 없다. 따로 배워본 적도 없고. 구축이냐 아님 신축이냐, 필로티 구조 주차장이 있냐 없냐 정도만 구분한다.


하지만 전문적이지 않은 만큼 조금 더 가볍고 솔직한 감상을 들려드릴 순 있을 것 같다. 친구에게 “여기 좋더라~ 한 번 가봐~”라면서 수다를 떨 듯 편하게 이야기를 해 볼 테니, 편안한 마음으로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서늘한 공간을 타고 울려 퍼지는 음악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하고 알려오면 4층 높이의 콘크리트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에 야트막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탓에 우뚝 선 건물의 모습이 점잖은 거인처럼 보인다. 파주시 탄현면은 아시다시피 북한과 맞닿아있는 곳이다. 콩치노 콩크리트가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만큼 이곳의 주차장에서도 북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할머니들, 할아버지들의 고향이라는 저 강 건너 땅은 날씨만 좋다면 꽤나 자세하게 보인다. 윗 세대에게는 그리운 곳일 테고, 아픈 기억이 남아있겠지만 솔직히 80년대 후반쯤 태어난 필자 세대에게는 다르다. 그냥 한 번도 안 가본 곳, 미지의 땅. 이런 최북단까지 커피숍이며 식당들이 그득그득 들어찬 요즘의 남녘 땅에 비하면 휑하고 허전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시야를 가로막는 고층 건물은 거의 없다. 여기보다 조금 더 넓게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 조금 부럽다.

      

주차장 입구에서 건물을 바라보면 입구를 찾기 어려울 수 있는데, 임진강을 등지고 건물을 바라보면 오른편에 출입구가 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그제야 비로소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음악 감상실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콩치노 콩크리트라는 이름은 꽤나 중의적으로 들린다. 콩치노(Concino)는 라틴어로 ‘합창하다, 합주하다, 울려 퍼지다’라는 뜻이고, 콩크리트(Concrete)는 (우리가 아는 그 콘크리트처럼)‘섞다, 혼합하다’라는 뜻이란다. 붙여서 해석하자면 ‘섞여 울려 퍼지다’ 정도로 풀이되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안도 다다오 스타일로 ‘나 노출 콘크리트 기법입니다’하는 내외관을 보면 ‘콩크리트’를 ‘콘크리트’로 해석하는 것도 영 틀린 건 아니지 싶다.


    

 

  


책, 낮잠도 어울리는 곳


노출 콘크리트 방식으로 건축된 내부는 더운 날씨(이날은 한낮 최고 기온이 23도까지 올랐더랬다)를 피하기 좋더라. 어린 시절 얼음땡을 하다가 아무 아파트 복도에 들어가 몸을 식히고 있을 때의 그 기분 좋은 서늘함이 살갗에 와닿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직원분이 조용히 맞아주시는데, ‘처음 와봤다’고 실토한 필자에게 간략하지만 친절하게 이곳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콩치노 콩크리트는 음악 감상을 위한 공간이고, 입구에서 제공되는 물 이외에 음식물 반입이나 취식은 어렵다. 딱히 좌석이 지정된 것은 아니니 콘서트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공간을 둘러봐도 괜찮다. 주말 낮에도 방문객은 많지 않았고 그 덕에 시원스레 뻥 뚫린 넓은 중앙 홀이 더 크게 느껴졌다. 거대한 스피커에서 모르는 클래식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이곳의 스피커는 귀가 아닌 피부에 와닿는다.


중앙 홀 의자는 그 스피커의 본연의 맛을 느끼기 좋다. 중앙 홀에 배치된 의자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3층과 4층 난간에 기대어 음악을 감상 중인 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3층과 4층은 2층 중앙 홀에 비해 조금 더 자유분방하게 의자가 배치돼 있다. 2층 중앙 홀에서 듣는 음악이 귀가 아닌 피부로 느껴지고 심장에 직접 때려 붓는 듯한 울림이라면, 3층에서는 건물 내벽을 타고 음악의 요소들이 소실되거나 겹쳐 더해지고, 부서지거나 덧입혀지면서 다르게 변주되어 들려온다.


4층에는 필자 같은 아싸들을 위한 공간이 좀 더 여럿 있다. 콘크리트 벽이나 기둥 뒤에 숨어 앉아있자면 웅장했던 음악 소리가 뭉툭해진 채로 들려온다. 그래서인지 3층과 4층에는 책을 읽는 사람과 낮잠 자는 사람이 꽤나 보인다.


만약 너무나도 고된 나날을 보낸 뒤에 정말 맛있는 낮잠 한 모금만 자고 싶다면 지루한 책 한 권을 들고 오시는 것도 좋겠다. 음악을 담요 삼아 햇빛 따뜻한 창가에서 잠들고만 싶어질 것.


     


  


뭐든 소화한다는 단단한 자신감


콩치노 콩크리트를 방문하기 전 가장 궁금했던 건 ‘어떤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였다. 앞서 언급한 ‘모르는 클래식 곡’을 제외하면 Karen Souza Paris,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곡이 기억에 남는다. 가장 좋았던 건 Andrea BocelliAmapola다. 우리 황여사(엄마)가 참 좋아하는 곡인데, 이곳에서 생각지 못하게 들려오니 참 반갑더라. 어린 시절 엄마 차를 타고 등교하던 길에 참 많이 들었더랬다. 그땐 엄마가 선곡하는 모든 노래들이 다 지긋지긋했는데(레퍼토리가 뻔해서), 지금은 그 시절의 추억에 배시시 웃게 된다.


Amapola는 개양귀비 꽃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1922년도에 작곡된 가사 없는 연주곡이었는데, 아르헨티나 출신 작사가가 연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한 가사를 붙인 뒤에 잘 알려지기 시작했단다. 우리나라 영화 <뷰티 인사이드(2015)>에도 삽입됐었는데, 아마 이 버전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도 많을 듯하다. 하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에 수록된 Ennio Morricone 버전도 좋고, 황여사 최애 픽인 Andrea Bocelli 버전도 좋다. 아무튼 진짜 좋으니 꼭 한번 들어보시길. 봄 날씨에 듣기 딱이다.

         

뷰티인사이드에 삽입된 Amapola 오케스트라 버전


어쨌든 앞서도 말했듯, 음악감상실이 처음이다 보니 처음엔 걱정부터 앞섰던 게 사실이다. 지루한(!) 음악만 무한 반복으로 듣다 오는 게 아닐까 하고. 다행히 경쾌하고 장엄하게 뱃속을 울리는 클래식부터 허스키한 음색으로 노래하는 재즈 보컬리스트의 곡, 광기에 사로잡힌 듯 다소 매니악한 연주곡과 추억의 한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테너의 목소리까지 다양한 음악이 유연하게 공간을 타고 흐른다. 듣다가 마음 한편에 꽂히는 곡이 있다면 직원분께 조용히 여쭤보는 것도 좋겠다.

 

     


    


그늘에서 쉴 만큼 쉬고 나서


이곳엘 들르면서 유독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많이 떠올렸던 것 같다.

자꾸만 어릴 때 얘기를 하는 건, 그만큼 몸과 마음이 힘들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 나도 모르는 새 어린애가 된다. 철딱서니 없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어른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일과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참아야 하니까,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어른이 됐으니까 자꾸만 좋았던 옛 시절을 추억하는 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학원조차 다니지 않을 만큼 어리디 어렸던 꼬맹이 시절, 그땐 오히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엄마 아빠만 보던 재미난 TV 프로그램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방영하고. 컴퓨터 게임은 하루에 2시간만 할 수 있고. 친구네 집에서 자는 것도 엄마 아빠의 허락이 필요하고. 어른만 되면, 30살만 넘으면 그런 것쯤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꽤 바보 같다. 어른이 뭔지도 모르는 유 리를 브랫 같으니라고. 어느새 나이를 꽤나 많이 먹은 지금도 내가 어른인지 잘 모르겠다.

열 식은 콘크리트 그늘 아래 숨어서 잠깐만 충전해도 별 먹은 슈퍼마리오처럼 반짝이며 뛰어다니던 꼬마애는 어딜 갔는지, 지금은 지겹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회색빛 직장인만 남았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이나마 우연히 반가운 옛 기억을 떠올리고, 후후 웃고 나면 뙤약볕 아래로 달려 나갈 힘을 얻는다.


이제야 어른이 되기엔 좀 늦어버렸지만, 어쩌면 이런 식으로 모두가 한 발씩 느릿느릿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피로에 찌든 어른이들이 이곳에서 음악과 책, 낮잠을 통해 한 소끔 휴식해보시길 권한다. 우리가 어릴 적 언젠가 그랬듯 그늘에 앉아 잠시 쉬고 나면 콘크리트 정글을 헤쳐나갈 기운을 얻어가실 수 있을지 모르니.

 



   

 

* 문의: 031-946-5800
* 운영시간: 11:00 ~ 19:30
* 정기휴무: 수, 목, 금
* 주차: 가능
* 입장료: 20,000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