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홀라 May 27. 2022

포비 DMZ, 언덕 너머 꽁꽁 숨어있는 최북단의 카페

꽤 단출하지만 너른 밭의 풍경이 평화로운


울긋불긋 꽃들이 하나둘씩 물러가기 시작한다. 아스팔트가 지난주에 비해 한결 더 후끈해지고 있고, 저녁 무렵 강아지를 산책시키다 보면 모기에 물리는 일도 늘었다. 서늘한 바람이 쌀쌀함이 아니라 시원함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어느샌가 여름이 오고 있다. 후텁지근한 여름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땀을 삐질삐질 쏟는 게 싫고, 숨이 턱 막힐 만큼 끈끈하고 습하면서도 뜨거운 공기가 싫단다. 


하지만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들 역시 많다. 일단 여름에는 휴가철이 있잖아. 또 날씨를 핑계 삼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좋다. 해가 길어지니까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히 여유가 생기고, 옷차림은 한결 가벼워진다. 여름이 다가오면 온 세상에 활력이 도는 것이 눈에 띈다. 겨우내 헐벗었던 볼품없는 가로수는 어느새 천천히 흔들거리면서 초록 이파리를 잔잔하게 나부낀다. 


계절이 여름을 향해 부지런히 무르익고 있지만, 반대로 느슨하게 힘을 빼 줘야 하는 시기도 있는 법이다. 뭔가 얼기설기 엉킨 타래가 도통 풀리지 않을 때. 숨 가쁘게 달리다가 갑자기 가야 할 방향을 잃었을 때 등. 이럴 때 덥다고 짜증을 내기보다는 모든 걸 멈추고 풀썩 주저앉아 천천히 강물이 흐르는 걸 지켜보는 게 더 낫다.  


5월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번 파주를 향했다. 이번에는 파주에서도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을 찾았다. 요즘 따라 내면의 평화가 필요해서 끌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곳 구석에는 한참을 넋 놓고 멍 때릴 수 있게 해 주는 벤치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철책 뷰

포비 DMZ



꽁꽁 숨어있는 최북단의 카페


파주는 넓다. 주말이면 붐비는 헤이리 예술마을이나 출판단지가 있지만, 드넓은 파주의 평야지대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구석구석 댕댕이들이 드러누운 채 할딱이는 콘크리트 길이 있고, 컨테이너 건물들 너머로 너른 논밭도 펼쳐져 있다. 정원이 멋진 단독주택도 꽤나 많고, 낡은 수우퍼-마켙을 끼고 있는 마을버스 정거장의 정겨운 모습도, 이제 막 짓기 시작해 콘크리트 먼지 냄새를 풀풀 풍기는 건설 현장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파주는 민간인 신분으로 갈 수 있는 우리나라의 최북단 지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북한과 관련된 관광지도 도처에 있다. 전망대나 기념비 등등. 남북한을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MDL)으로부터 7km 남쪽에 세워진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역시 파주의 대표적인 관광지 가운데 하나다. 


이번에 방문한 포비 DMZ는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안에 ‘숨겨져’ 있다. 문자 그대로 정말 숨겨진 카페다. 면적 넓은 파주 관광지답게 공원도 꽤나 큰데, 널찍한 주차장을 지나고 평화의 종과 망배단이 있는 언덕 너머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도 안쪽으로 깊숙한 곳에 포비 DMZ가 있다. 공원 안쪽으로 깊고 긴 곳에 숨겨진 것 치고는 꽤나 단출하다. 3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자그마한 건물이 전부. 따로 2층도 없고 지하도 없다. 




 


광활한 철책 뷰가 펼쳐진 유리 구조물


포비 DMZ는 바가 있는 안쪽 면을 제외한 모든 면이 유리로 되어있다. 유리로 된 간이 휴게소와 같은 느낌이랄까? 외부에서 보면 미국의 건축가 필립 존슨의 ‘글래스 하우스’를 떠올리게 한다. 심플하고 깔끔한 인상을 주는 포비 DMZ는 공간이 작은 만큼 내부에 앉아서 쉴 만한 자리가 많지 않다. 이 머나먼 곳까지 왔으니, 이왕이면 답답한 실내보다는 카페 외부에 여유 있게 마련된 벤치를 이용하시라는 배려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포비가 베이글이 맛있기로 유명한 카페인만큼 베이글을 판매하고는 있으나, 이곳에서 먹고 가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 소분된 스프레드도 없고, 따끈하게 데워주실 수도 없다고. 베이글만을 위해 이곳을 올 분이 얼마나 있겠느냐만, 만약 아쉽다면 포장해 가는 것으로 만족하셔야겠다. 


베이글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은 핸드드립 커피로 달랠 수 있다. 이날 준비된 케냐산 원두는 새콤달콤한 산미가 그대로 살아있었고, 낮이 되면서 슬슬 달궈지는 몸의 열기를 한풀 식혀줬다. 그밖에 드립백에 든 커피나 원두, 러스크, 머그 등의 굿즈를 판매하고 있으니 둘러보는 것도 좋다. 




   


철책과 가시, 하지만 세상 평화로운 벤치


5월 중순의 맑고 쾌청한 날씨는 자연스럽게 야외의 벤치로 발길을 이끈다. 건물 옆면으로 임진강이 내다보이는 철책이 있고, 철망 너머를 바라보며 앉아 쉴 수 있는 벤치가 많다. 꼭 철책 뷰가 아니더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은 많다. 공원에서도 외진 곳까지 찾는 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으므로 자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 포비 DMZ의 입구와 마주 보는 위치에는 나무 한 그루와 함께 벤치가 있고, 건물 뒤쪽(입구의 반대편)에도 그늘진 곳에 벤치가 있다. 어쨌든 이곳에는 군데군데 벤치가 아주 많으니 날씨가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을 이맘때에 들르기 좋은 곳이다. 주변이 조용하기 때문에 선선하게 불어오는 강바람과 함께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 좋다. 


철책 안쪽에는 기차선로가 있는데, 타이밍이 맞으면 선로 점검차가 땡땡거리며 지나가는 걸 볼 수도 있다. 그 뒤로는 논과 밭이 있고, 그보다 더 먼 곳에는 임진강이 유유히 흐른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대체로 연령대가 어느 정도 있는 듯하다. 휠체어나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나이 든 자식과 함께 방문한 노인들은 오랫동안 임진강과 그 너머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이 노인들은 흐릿한 눈에 굽이굽이 임진강 물결처럼 흐르는 산의 부드러운 곡선을 담고 있겠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실향의 아픔과 함께 저어 멀리 어딘가 있을 그들의 고향 땅을 품고 있을 터다. 


반대로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끌려온 째그만한 어린이들은 철조망이나 임진강의 경치에 별 관심이 없다. 보도블록 위로 돋아난 민들레나 풀꽃, 개미떼들의 행렬에 더 관심 갖는다. 철책 너머가 바로 북한이라면야 또 모르겠지만, 군사분계선 너머 북한까지 보이려거든 7km나 더 가야 한다. 애들에게 7km는 꽤나 먼 거리다. 


사실 이곳에서 가슴 끓는 망향의 슬픔 같은 건 찾기 쉽지 않다. 그저 느릿하게 흘러가는 임진강(유속은 빠르다지만, 그래 보이질 않는다)과 곡식이 익어가는 너른 밭의 풍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고 살벌한 곳 중 하나가 남북한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이건만 평화로운 풍경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오죽하면 ‘평화랜드’라고, 주말이면 바이킹이며 회전 컵이 돌아가는 유원지까지 있을까. 




   


흐르는 임진강처럼 


포비 DMZ의 철책 너머 논밭은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기 좋다. 가을 무렵에는 황금색으로 물든 경치를 감상할 수 있고, 겨울에 오면 쓸쓸함을 품은 휑한 논밭 위로 새하얗게 쌓인 눈을 볼 수도 있다. 


요즘은 녹색의 풀잎들이 파란 하늘처럼 짙어져 가고 있다. 가끔씩 논두렁으로 트랙터가 지나가는데 대학생 시절 ‘농활’을 겪어 본 분이라면 그때의 추억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친한 동기나 선후배와 함께 낯선 농촌에서 머물면서, 땡볕 아래 일도 하고 어머님 아버님이 마련해주시는 식사도 하고, 저녁 무렵엔 고기와 수박을 배가 터지게 먹고 어르신이 주시는 막걸리 몇 잔을 받아먹다 보면 피곤함이 몰려와 금세 뻗어버리곤 했는데. 어쩌면 이곳 뷰 역시 막걸리 한 사발 하기에 좋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곳은 원래 1970년대 임진각을 찾은 실향민들이 실향의 아픔을 막걸리 잔에 담아 비워내곤 했던 민속주점 자리였다고 한다. 해가 뉘엿해지는(어느새 일몰 시간도 늦어졌다) 무렵이면 임진강 너머로 지는 태양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윤슬을 만들어내는데, 그게 퍽 장관이다. 어쩌면 실향민들은 이곳에 모여들어서 강 너머로 지는 노을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을 넘기고, 쓰린 가슴을 위로하셨을지 모른다. 


지금은 막걸리를 걸칠 수 있는 민속주점 대신 카페가 자리했고, 이곳은 6시에 영업을 종료한다. 하지만 인심 좋게 곳곳에 놓인 벤치가 있으니, 커피를 아껴 마실 수 있고 시간만 넉넉하다면 저녁놀이 진 뒤에도 머무를 수는 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유리로 된 포비 DMZ도 주황빛, 붉은빛으로 물들어간다. 자그마한 건물 구석구석이 골고루 물드는 모습을 천천히 감상하시는 걸 추천한다. 이왕이면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흐르는 강물처럼(1992)> OST의 1번 트랙 ‘A River Runs Through It’를 함께 들으며 조용하고 평화로운 노을을 느리게 바라보시길 바란다. 




  



* 문의: 070-7774-6552
* 영업시간: 평일 09:00 ~ 18:00, 주말 09:00 ~ 19:00
* 라스트 오더: 17:3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