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리그 타운 이야기 - 하노버 2
1761년 공식적으로 마을 (Town)로 지명된 뉴햄프셔 하노버는 총면적 130.2평방 km에 약 1만 2천 명 인구가 흩어져 살고 있다. 그중 약 8천 6백 명 정도는 다트머스 컬리지 주변인 인구조사 지정구역 (Census-designated place, CDP)에 모여산다고 하는데, 그 면적은 약 13평방 km이다.
서울 서초구 면적이 약 47평방 km이고 인구는 약 41만 명이다. 서초구의 1/4 면적인 12평방 km에 약 10만 명이 살고 있다고 가정하면, 같은 면적인 하노버 CDP에는 10분의 1도 안 되는 인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매우 한적하다.
이 작은 마을 하노버의 역사는 다트머스 컬리지의 역사일만큼 마을과 학교는 처음부터 서로 발전해왔다. 다트머스 컬리지는 미국 동부 13개 주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설립된 9번째 대학이다. 컬리지의 초기 역사를 알아보니, 제국주의 시대 때 영국의 식민 관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학교를 설립한 엘리저 윌록은 예일 대학을 졸업했고, 1754년 코네티컷 레바논 (레바논은 현재 뉴햄프셔주에 속한다)에 원주민을 교육하기 위한 무어 자선학교 (Moor's Charity School)를 설립했다. 이 자선학교에서는 '사냥 등의 혹독한 생활을 하고 있는 원주민의 문제점'을 개선시키기 위해 원주민들을 기독교화하고 서양식 교육을 주입시켰다.
무어 자선학교를 설립하기 전 윌록은 '라틴학교'를 운영했는데, 이때 교육을 받았던 미국 원주민인 샘슨 오콤 (Samson Occom)이 교사/전도사가 되어 코네티컷, 롱아일랜드, 뉴욕주 등지에서 원주민들을 가르치고 전도하다가, 윌록이 무어 자선학교를 운영하는 시기에 다시 돌아왔다. 윌록은 오콤이 영국 런던에 가서 무어 자선학교를 위한 기금을 모아줄 것을 설득했고, 이에 동의한 오콤은 1765년 런던으로 떠나 조지 3세 등 많은 왕가와 귀족들로부터 기금을 모아 1768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이 무렵 무어 자선학교는 50명의 원주민이 졸업해서 15명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원주민 포교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콤이 기금을 모아 돌아왔을 때, 윌록은 기금을 무어 자선학교에 쓰지 않고, 다트머스 컬리지 설립에 사용했다. 물론 영국도 다트머스 컬리지 설립을 공식적으로 허가했고 윌록은 다트머스 컬리지의 1대 총장이 된다. 다트머스 컬리지는 처음부터 컬리지 헌장에 따라 원주민 입학도 허가했지만, 사실상 대부분 동부 13개 주에서 태어난 영국인의 자손들 입학에 중점을 두었다. 오콤은 결국 뉴햄프셔를 떠나 뉴욕 근처에 자리를 잡고 수많은 원주민들이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자리를 잡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 하노버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트머스 컬리지가 1769년 설립되고 1770년 공식적으로 첫 개학을 했을 때에는 하노버에 스무 가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윌록은 다트머스 컬리지가 개학을 한 지 1년 만인 1771년에는 그리스도의 교회 (Church of Christ. 오직 성경만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개신교의 한 종파)를 창설하고 1795년에 다트머스 그린 (다트머스 컬리지 중앙에 위치한 대형 잔디밭) 북서쪽에 교회를 짓는다. 이 교회는 142년 뒤 불에 타 완전히 전소되었다. 그 후, 이 자리에는 베이커-베리 도서관 (Baker-Berry Library)이 지어졌고, 교회는 도서관 바로 옆에 다시 건축되었다.
이렇게 영국 식민시대에 세워진 학교와 교회를 바탕으로 하노버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학교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학교가 지어진 곳은 자연스럽게 마을의 중심지가 되었고, 현재에도 학교와 마을의 다운타운은 같은 곳에 서로 경계 없이 들어서 있다.
영국에서 받은 기금으로 설립된 다트머스 컬리지가 나날이 발전하여 하노버는 컬리지 타운으로 성장을 시작했지만, 1775년 동부 13개 주에서 영국이 불공정한 세금을 부과하자 하노버도 영국 수입품을 보이콧하기 시작하고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군인을 파견하여 캐나다 등지에서 영국군과 싸웠다. 미국은 1776년 7월 4일 독립하였다.
한편, 윌록은 그의 아들인 존 윌록을 후계자로 임명하고 1779년에 사망한다. 그러나 존 윌록은 당시 고작 25살이었기 때문에 이사회는 처음에는 임명을 미루었다. 그러나 존 윌록이 월급을 받지 않고 일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이사회는 일단 그를 2대 총장으로 임명했다. 그 후 존 윌록이 일하는 방식을 두고 이사회뿐 아니라 학생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존 윌록은 결국 파면당하고 레버런드 프란시스 브라운 (Reverend Francis Brown)이 3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존 윌록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뉴햄프셔주 민주당원들을 찾아가 이 사실을 발설했다. 이에 민주당원들은 다트머트 헌장은 영국 제국의 충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므로 독립국가인 미국과는 맞지 않다며 '컬리지 (College)'를 '대학 (Univerisity)'으로 바꾸고 이사회의 수를 12명에서 21명으로 늘렸다. 또, 이사회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외부 감독 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로써 다트머스 컬리지는 사실상 사립대학에서 국립대학으로 바뀌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 싸움은 진흙탕 싸움이 되어 오랜 시간 끝맺지 못하고 1817년 존 윌록이 사망해 버렸는데, 다트머스 컬리지 졸업생이었던 다니엘 웹스터 (Daniel Webster)라는 변호사가 12명의 초기 이사회 멤버의 전폭적이 지원 하에 다트머스 컬리지의 전 회계담당자인 윌리엄 H. 우드워드 (William H. Woodward)에 대해 소송을 걸면서 이 사건을 맡게 되었다.
웹스터는 뉴햄프셔 법원에서는 패소했다. 이에 바로 연방 법원에 항소한 후 대법원에서 사건을 호소한다. 연방 대법원에서 결국 웹스터는 승소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대법원장은 웹스터의 연설에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렸다고... 웹스터의 주장은 국가가 사립대학이 만들어놓은 계약을 함부로 수정할 수 없으며 아무리 국가라 하더라도 교육의 자유를 빼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웹스터가 승소함으로써 이 사건의 판결은 미국 전역에서 정부로부터 사기업의 독립성을 보호하기 위한 단서가 되었다. 또한, 비영리기구와 같은 기관이나 단체가 자유롭게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고 이 나라 저 나라 할 것 없이 정부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는 요즘 참 와닿는 사건의 판결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아무튼 후에 웹스터는 미 연방 상원의원 및 미 국무장관을 여러 번 역임하게 된다.
웹스터가 법원에 호소할 때 '아무리 작은 학교이라지만 이 학교를 평생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트라우마가 생긴 다트머트 컬리지는 이후 지금까지도 절대 대학 (University)으로 명칭을 개명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이런 웹스터가 다트머스 컬리지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묶었던 커티지 (Cottage)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으니 한번 다녀올만하다.
커티지 내부는 웹스터와 관련 있는 소품들을 구경할 수 있는 박물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18-19세기 가정집의 내부 장식을 잘 재현하고 있다. 추운 겨울에는 문을 닫고 따뜻한 시기만 수요일과 토요일 제한된 시간에 문을 여니 미리 확인하고 가야 한다. 여기를 방문하면 집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 버츄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웹스터 커티지를 왼쪽으로 두고 메인 스트릿 (Main Street)을 따라 한적한 거리를 산책하면서 다트머스 컬리지의 건물들도 감상하면 좋다. 다트머스 컬리지 동아리 건물들에서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을 하는 장면들도 볼 자주 볼 수 있다.
계속 걷다 보면 오콤 연못 (Occom Pond)이 왼편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 샘슨 오콤의 이름을 딴 연못이다. 한 겨울에 연못이 꽁꽁 얼면 다트머스 컬리지 학생들과 마을 주민들이 이 연못 위에서 아이스하키 경기도 하고 스케이트도 탄다고 한다.
오콤 연못을 끼고 계속 걸어가면 다트머스 아우팅 클럽 하우스로 가는 길이 나온다. 다트머스 아우팅 클럽 (Dartmouth Outing Club)은 1909년 겨울 스포츠를 증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미국 최초의 대학 클럽이다. 규모도 가장 크다. 현재 1,500명 정도의 다트머스 학생들이 가입되어 있으며, 카누클럽, 등산클럽, 바이크 클럽, 스키클럽 등 다양한 소모임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다트머스 아우팅 클럽을 지나면 오콤 연못과 다트머스 컨트리클럽 골프코스 주변에 평화롭고 아름답다는 말뿐이 나오지 않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아침 일찍 또는 해가 질 무렵 산책하는 것도 좋다. 이 산등성이의 이름도 오콤의 이름을 따 오콤 릿지 (Occom Ridge)라고 불린다.
오래전에 지은 건물들을 부수지 않고 한번 전통이 만들어지면 지속해서 관리하면서, 어제와 어울리도록 오늘을 가꾸는 태도로 수백 년 간 천천히 정교하게 마을을 정비한 것에 대한 보상이 바로 이런 평화로운 장면들 아닌가 싶다.
[참고자료]
https://townsquarepublications.com/history-of-hanover-nh/
https://dartreview.com/history-of-dartmouth/
https://hanoverhistory.org/timeline-of-hanover-new-hampshire-history/
https://dartmouthalumnimagazine.com/articles/25-most-influential-alumni
https://www.dartmouth.edu/library/rauner/exhibits/matter-absolute-necessity-moors-charity.html
https://hanoverhistory.org/timeline-of-hanover-new-hampshire-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