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김성경
“그건 좀 위험할 것 같아.” 근맥 회의 날. 아이템1) 을 들고 가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다. 세상 좀 바꿔보자고 언론 기구에 들어간 건 아니지만, 위험을 이유로 기사를 쓰지 않겠다니 환상이 와장창 깨진다. 분란도 비난도 싫어 선택받지 못할 위험한 아이템 대신 조금 재미있고, 귀엽고, 적당히 공감받을 아이템을 가져갔다. 조금의 비판을 곁들여 기사를 채웠다. 취업 때문에 불안하고, 세상살이가 외롭고, 콘텐츠가 유해하다는 등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1년 동안 열심히 썼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한 번은 들었던 이야기, 다수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였다. 새로운 시각이나 생각을 말하기에는 능력도 시간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위험하다는 말
위험하다는 말은 만능이다. 어디에나 쓸 수 있고 별다른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아이템 회의뿐만 아니라 발간 전 과정에서 위험하다는 말은 수시로 튀어나온다. 개요를 쓰면서, 글을 첨삭하면서, 마지막 교정을 볼 때까지 위험 요소는 끊임없이 생겨난다. 이 말은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끊임없이 논쟁이 일어나는 의견, 정치적 발언, 자료가 너무 방대해 찾기 어려운 주제, 일반적인 여론에서 벗어난 시각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논문과 기사를 근거로 쓰지 않는 문장과 오류를 전부 보완할 수 없는 주장 역시 위험의 범주에 포함된다.
누군가 위험하다는 말을 꺼내면 그 앞에서는 모두가 입을 다문다. 책임질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 없기 때문일까. 무언가 설명하고 싶지 않은(혹은 설명할 능력도 없는) 우리에게 위험은 피해 가야 할 요소이지 부딪혀 싸워야 할 요소가 아니다. 쉽게 수긍하고 쉽게 단념한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애초에 내지 않는 게 좋다.
언제는 타자화가, 언제는 중립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이유가 됐다. 근맥 회의를 준비할 때면, 정말로 필요한 이야기보다는 공격받지 않을 아이템, 사라지지 않을 아이템을 가져가는 게 더 중요했다. 세상은 너무 거대한데 우리가 파악하는 건 극히 일부였다. 할 수 있는 말을 찾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지금 세상이 요지경에 가깝지만,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모른다. 대통령은 벌써 이유 없이 8개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태원 특별법이 통과되어 지금 거부권을 한 번 더 행사할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2) 지하철 민영화와 전기·의료 민영화, 이태원 참사, 복지 예산 삭감 등 문제는 많은데 쓸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이런 문장은 위험을 이유로 반드시 삭제해야 하는 문장이다. 검열 후 기사는 평화롭다. 어떠한 소음도 발생하지 않는다. 언론은 안온하고 부드럽고 말랑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이 언론 존립을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기사를 써본 사람은 안다.
정치는 민감한 사안이라고 쳐도, 검열당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석탄 발전소 이야기는 화석 연료에 관한 입장은 하나로 정리하기 어려워 쓰지 않았다. 특정 기업에 관한 이야기는 시기가 적절하지 못해 쓰지 못했다. 트랜스젠더에 관한 이야기는 입을 뗄 수도 없었다. 글에서는 개인적인 맥락도, 누군가의 위치성도 밝히지 않아야 한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큼의 자료 조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공부하고 이해할 여력이 없었다. 내 옆자리 동료는 이미 지쳐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목소리를 줄여 그들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서로 사이는 좋았으니까. 이만하면 됐다, 생각하며 넘어갔다.
내가 쓴 글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열정을 불태워 아이템을 찾고 끈질기게 이 글의 필요성을 어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우리는 ‘근맥 아무도 안 보잖아’라는 말을 내뱉으며 냉소적으로 방어 태세를 갖췄다. 신입생 안내 책자에 이름 하나 실리지도 못한 우리인데, 누군가 알아주기는 할까? 이런 곳에서 열정을 태우는 건 바보 같은 일이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덤비는 건 눈치 없는 행동이다.
논쟁이 쓸모없는 건가? 내가 분란을 만드는 걸까? 질문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글에는 주장이 있어야 했고, 주장은 객관적 지표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내가 느낀 것, 누군가의 진술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수치가 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어떤 자료는 의도적으로 은폐된다. 예전 특집으로 의료 민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는 그 위험성을 지적하는 논문을 찾을 수 없었다. 의료 수가에 관한 안 좋은 내용만이 들려왔고 언론은 민영화에 관해 긍정적인 의견을 쏟아냈다. 이 외에도 바이오 자료와 민영화의 연관성, 활용 방법에 관한 정보 수집 자체가 쉽지 않았다. 자료의 신뢰성과 객관성을 가늠하기도 어려운 게 우리의 현실이었다.
틀릴지도 모르는 생각을 쓰는 건 일기장에나 하는 것이지 여기서 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말은 모든 글의 족쇄가 됐다. 글은 생각과 의견을 담는다.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삼는다지만, 사실은 내 의견과 일치하는, 글에 유리한 자료일 뿐이다. 사실을 작성한다고 해도, 왜곡과 오해, 해석을 통한 재진술일 수밖에 없다. 오류도 없고 객관성을 잃지 않는 글, 그런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검열의 끝
검열에 종식은 없다. 단지 발간을 앞두고 지친 우리가 대충 타협하는 것뿐이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일주일에 한 번, 최소 3개에서 5개의 아이템을 가져와야 한다. 최근 3개년 근맥에 실렸던 아이템은 가져갈 수 없으며, 시의성도 어느 정도 갖춰야 한다.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회의 후 집에 가면 12시가 되어간다. 종강 후 모든 아이템을 취합해 최종 기사 아이템을 선정한다. 회의 이후에는 기사 작성과 퇴고의 반복이다. 대략 8페이지의 기사를 작성해 가면 오전 10시에 모여 오후 10시까지 첨삭 후 헤어진다. 이 과정을 3번 반복하면 마감이다. 이후 디자인 사무실에 원고를 넘겨 교정을 본다. 여기에 토론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기존에 작성된 글과 다른 의견을 내면 첨삭이 한 번 늘어나고, 마감은 며칠 늦어진다. 토론과 논의가 중요해도 발간이 우선이다. 마지막 교열을 보러 갈 때면 반쯤 포기한 상태가 된다. 참고문헌 양식 정도는 검토하지만, 기사 내용을 바꾸기는 이미 늦었다. 편집권을 핑계로 존중해야 할 때와 논의가 필요할 때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몫으로 넘겨버린다. 위험한 덩어리들은 이미 잘라냈으니 커다란 실수까지는 없을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과 여기까지 와서 뭘 더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귀찮음이 우리의 침묵을 완성한다.
침묵 속에는 각기 다른 능력에 관한 힐난이 포함된다. 우리의 능력치가 전부 비슷한 수준인 건 아니다. 그러나 대개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1-2개의 기사를 쓴다. 기사의 내용, 방향, 표현 등 한 기사를 통괄하는 독립된 편집권을 갖는다. 언뜻 보면 수평적이고 낭만적이나 실상 개인에게 모든 걸 떠맡기는 시스템이다. 자료 조사, 각주, 기사 방향을 각자 해결해야 한다. 누군가는 시야 확보가 어렵고, 누군가는 문장 전개 능력이 떨어진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야 하지만, 자료 조사부터 기사 작성까지 협업할 자신도 없다. 그렇기에 이 모든 걸 편집권(을 빙자한 방치권)으로 무마한다.
다른 시각은 생각의 차이를 만들고 문장의 간격을 벌린다. 이는 학기 중 다양한 공부, 토론, 글쓰기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학점과 대외활동, 침대에 누워있고 싶은 욕구를 어느 정도 내려놔야 한다. 지금이 교내 활동 하나에 그렇게 많은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시대인가? 시대 탓을 하고 싶지 않더라도 내 인생이 더 중요한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능력과 시야의 차이는 단시간에 해결되지 않으니 개인이 능력껏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일이 된다. 이 과정에 지쳐 내용에 관해 이야기할 체력은 줄어들고 피로에 잠겨 날카로워진다. 문장에 관해 질문하고 지적하는 것을 공격의 일종으로 여기기도 한다. 우리가 우리를 책임져야 하지만, 나 하나 챙기기도 바빠진다.
책임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교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은 상황에서 근맥의 위치는 애매하다. 기사의 독립성을 지키고자 자치 기구 형태를 선택했지만, 교지는 이제 사회를 고발하거나 흔들 만큼 영향력 있는 매체가 아니다. 검열은 어떠한 상황으로부터의 위협이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 일을 상정해 잘라낸다. 상황이나 결과를 만들 수 없는 단체를 검열하는 사람은 없다. 잊힌 언론 기구에게 세상은 해야 할 일을 주지 않는다. 소속되어 있지 않으니 특별한 목적도 없다. 의견을 구하거나 다른 모델을 참고하기도 어렵다. 독립된 편집권은 길 잃은 단체가 줄 수밖에 없는 권한이다.
이 시대에 책을, 하물며 교지를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던 80-90년대 대학 언론이 아니다. 목표도 정체성이 뚜렷하던 시간은 이미 지났다. 이제는 근맥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워 동아리로 지칭한다. 함께 싸운 적이 없어 동료가 될 수 없는 친구들이 남았다. 한바탕 싸움이 끝난 이후 방황하는 용사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직접 정해야 하는 건 외롭다.
이런 독립 언론은 보호해 줄 기관이나 시스템이 없다.3) 딱히 도움을 청할 곳이 없기에 우리가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 그렇지만, 고작 20대 초반인 우리가 서로를 지키는 건 쉽지 않다. 편집권은 각자도생의 다른 말로도 사용된다. 같이 헤쳐 나가는 건 어려우니 스스로 어떻게든 해내라고 편집권을 준다. 공격은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고, 정직하게 오지도 않는다. 굳건하게 기사를 쓰기에는 매 학기 근맥의 존립이 걱정된다. 세상을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었건만, 애정 하나에 걱정과 제지가 주렁주렁 매달린다.
할 수 있는 것? 없습니다.
이 모든 게 무관심이나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개인과 사회가 연결되며 파생된 현상이다. 물론 처음 기사를 쓸 때는 조심해야 하는 것이 많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말, 약자를 공격하거나 혐오하는 표현은 당연히 없애야 한다. 타자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삭제된 건 그뿐이 아니다. ‘단정 짓는 표현은 의견 피력으로 보일 수 있으니 최대한 피하는 게 좋다.’ ‘이 표현은 논란이 될 수 있으니 다른 단어로 교체해라.’ 언뜻 보면 맞는 말 같은데 다 없애고 고치니 기사에는 내 이름만 남아있는 수준이다.
정말 웃기고 자괴감이 드는 것은 부조리함에 관해 실컷 떠든 나조차 현재를 유지할 궁리만 한다는 것이다. 수습위원이 들어와 아이템을 가져오면 논란거리는 없는지 우선 살펴본다. 그 후 첨삭을 아주 꼼꼼히 해야 하거나,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아이템은 ‘위험하다’, ‘시간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거르고 거른다. 이제 활동도 끝나가는데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도 않다. 아, 이전 언니들도 이런 마음이었구나. 애정은 있지만, 연대까지는 조금 오바인 것 같은 마음. 연대 책임이라고는 하지만, 거기서 나는 빼줬으면 하는 마음. 현실적이고 옹졸한 마음은 너무 강력해서 이기기 쉽지 않다. 나 역시 이 마음에 쉽게 진다.
이제는 회의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아이템을 가져간다. 하고 싶은 말이 없다고 해도, 발간일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박수받을 만한 소재는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멋진 일을 해내려 했지만, 글은 내 마음대로 써지지도 않고 나의 지식은 너무 얕다. 그래도 쓰라고 하니 쓴다. 누군가와 피의 맹세를 나누지도 않았고 계약서 한 장 쓴 적 없지만, 무슨 의미라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쓴다. 사막의 신기루보다 희미한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야기가 찾아오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이야기도, 비위를 맞추는 이야기도 제대로 해낸 것이 없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글을 고치면서 소외당한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마감일을 보고 달렸다. 글 쓰고 첨삭하느라 한 달짜리 배낭여행을 한 번도 못 간 게 아쉬웠다. 진지하거나 열정적일 수 없어 뒤편으로 치워둔 가치들은 오랜 시간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할 수 없는 상황과 할 수 없는 사람이 만난 것이다.
그 누구도 근맥을 찾지 않을 것 같아 침묵하고 이미 사회적 문제로 거론된 것, 누군가 동조할 이야기만을 찾아온다. 필요한 이야기보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이렇게 근맥은 1년에 2번 무사히 발간되었다. 근맥은 지켰으니 큰 목표는 이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목격하고 듣고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 여전히 우리는 존재하고 있을까?
마지막 고백
이렇게 구구절절한 이야기의 끝은 놀랍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근맥의 이름을 빌려 썼으나 언젠가 한 번은 봤을 법한 권태와 비겁함에 관한 이야기다. 별다를 것 없이 세상을 살아가며 소명 의식과 정의가 내 안에는 남아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무언가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세상을 내려다봤다. 막상 내가 본 세상을 글로 쓸 수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좁은 세상에 사는 우리가 세상의 크기를 말하기는 어렵다. 내 몸집보다 크고, 올라서기 힘들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안 난다. 느끼고 생각한 대로 단편적인 기사를 내놓았다. 언론은 완전무결하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다. 약자의 편을 들지도 않았고 오류를 바로잡지도 않았다. 연대와 지지가 필요한 일에는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했다. 새로운 변화가 두려웠고 그로 인한 실패와 반발이 무서웠다. 현상만 유지하면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지금의 현실을 어쩌면 조금 사랑했다.
겁쟁이처럼 도망친 와중에 근맥이 여전히 존재하길 바란다. 세상을 바꾸지 못했고, 글을 쓰는 태도가 올바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계속 흘러가며 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잘못되고 편협한 시각이 담긴 글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때는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리다. 10년 전 근맥 기사를 읽으면 여성 혐오적 요소가 많아 우리조차 웃고 있다. 물론 우리가 건넨 질문이 언제나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비겁하고 부조리했음을 부정하지도 않겠다. 망설임조차도 상처가 될 때가 있다. 우리의 행동이 그랬다.
대학 생활을 불사하며 글을 쓰진 않겠지만, 적어도 근맥이 존재하는 이유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돌려볼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쓰는 방법은 모르니 그냥 쓴다. 우리의 작은 세상은 붙여 모으면 조금 더 큰 세상이 되고 그 세상 속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앞으로 우리가 쓸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이 글이 문제의 핵심을 짚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질과 핵심을 짚는 능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 문제는 어떤 현상의 단편이다. 여러 부스러기 현재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을 모은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현상을 해결할 절대적 방안은 없다. 여러 장소에서 수많은 방법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건너편의 소리를 듣고 싶다.
그러니 염치 불고하고 부탁하자면, 근맥을 많이 읽어주세요.
1) 기사로 쓸 만한 주제를 아이템이라고 부른다.
2)2024년 1월, 윤석열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과 관련해 다시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기사 작성 시점인 12월에 맞추어 이를 그대로 표기한다.
3) 오로지 학생들의 사랑과 관심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