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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맥교지편집위원회 Apr 09. 2024

[86호][청년] 21세기 실패담

수습위원 송주은



 또 죽었다. 

 스테이지를 깨기 위해 도전한 만큼 실패를 봤다. 다시 도전하기 위해서는 코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코인이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번엔 반드시 성공한다는 다짐의 끝은 늘 똑같다. 항상 실패다. You Lose. 고작 두 단어뿐인 문장이 모든 걸 말한다. 게임에서 패했고, 코인을 잃었고, 시간을 허비했다. 이제는 코인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나는 너무 자주 실패자가 된다. 


 나는 너무 많은 곳에서 실패자가 된다. 


 STAGE 1. 끝없는 실패

 19살 끝자락, 하향 지원한 지방 대학에 합격했다. 바라던 대로 대학생이 됐지만,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적어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줄 알았는데, 상상해 보지 않은 미래였다. 인터넷에 떠도는 지방 대학생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됐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모든 기회를 놓친 것만 같았다. 원래 제 내신은 중상위권이었는데 지원 전략을 잘못 짰어요. 수능은 조금 더 나은데, 수시 납치 아시죠? 같은 변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 대학이 내 노력의 결과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대학 이름은 지나온 모든 시간을 압축했다.

 합격 발표와 대학 입학식 사이 붕 뜬 시간 동안 나에게 되물었다. 왜 더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때 왜 한 문제 더 풀지 않았을까? 어느 날은 모든 게 내 탓처럼 느껴졌다가 다른 날은 학력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와 입시 제도에 모든 책임을 돌리고 싶었다. 친구를 만나도 해소되는 건 없었다. 새 학기를 기대하는 그들과 나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맞다, 너 그 이야기 들었어? 지혜 이번에 인서울 했다더라. 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적은 나랑 비슷하지 않았나? 어떻게 인서울을 한 거지? 그러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나 방금 좀 최악인데.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첫 학기가 시작됐지만, 우울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만족한 학교가 아니었기에, 정문을 지날 때마다 이곳에서 4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울렁였다. 처음으로 한 타지 생활도 쉽지 않았다. 학교를 싫어하니 적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건 당연했다.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기숙사에 입사했지만, 주말마다 먼 길을 돌아 집으로 갔다.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룸메이트가 물었다. 너 이번 주말에도 집 가지? 그럼 내 친구 데려와도 될까? 벙찐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들 벌써 친해졌구나. 나는 아직도 모든 게 낯선데. 적응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다시 패배감이 들었다. 대학 생활을 즐기고 있는 룸메이트와 달리, 나는 누군가 대학을 물어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다. SNS에서 좋은 대학에 간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여기보다 높은 곳을 가야 했는데,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같은 생각이 휘몰아쳤다. 합격한 대학이 나를 대변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결국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서를 냈다. 그리고 22살, 덕성여대에 입학했다.


 이상하게도 실패라는 생각에는 끝이 없다. 스물둘에 일 학년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남들보다 2년이나 늦어 버린 출발은 최상위권 대학일 때만 용납될 것 같았다. 20살에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나에게는 손에 꼽을 명문대라는 면죄부가 필요했다. 늦은 만큼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괴롭혔다. 지금의 결과가 만족스럽다가도 실패했다는 생각에 한없이 우울해졌다. 대학 라인을 줄 세워 나의 위치를 가늠했다. 검색창에 ‘덕성여대 인식’ 같은 걸 넣어보고 낙담했다가 학교를 칭찬하는 글을 보며 위안받았다. 사람들의 평가 하나에 인생이 널뛰었다. 지금 내 불안이 패배감이 만들어 낸 감정이란 걸 인정할 수 없었다. 발 내딛는 곳마다 실패로 점철된 기분이었다. 그리 원하지 않았던 대학에 붙은 것,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하고 학교를 도망쳐 나온 것,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입학하게 된 것, 심지어는 내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까지도 결함으로 느껴졌다. 


 STAGE 2. 사회와 실패

 누가 정한 건지도 모를 성공의 기준이 평생을 따라다닌다. 덕분에 내 인생은 매분 매초 평가의 대상이 된다. 초·중·고, 알맞은 나이에 들어가 19살에 졸업한다. 20살에는 인서울 4년제에 간다. 여름방학 때 컴활과 토익을 준비한다. 대외활동은 서너 개 정도, 인턴은 최소 한 번, 졸업은 적어도 25살까지 해야 한다. ‘평범’과 ‘보통’이라는 이름 아래 만들어진 이 인생 계획표는 멈출 줄을 모른다. 취업과 결혼, 자녀계획, 은퇴, 자산, 모든 기준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 기준에 따라 적합과 부적합을 판단하는 이 일련의 시험들은 나의 능력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나의 위치를 만들어 낸다. 

 

▲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2023)> 사진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2023)>는 실패를 바라보는 사회와 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등장인물 ‘서완’은 여러 차례 공무원 시험에 낙제한 고시생이다. 긴 고시 생활의 딜레마와 좌절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게임은 그의 유일한 쉼터였다. 게임에 빠져든 그는 망상장애를 얻었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게임 밖 현실을 깨닫고 고시생의 삶으로 돌아가지만,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압박감을 느낀다.  


“5년, 10년 노력한 걸 누가 알아줘? 노력도 결국 붙어야 인정을 해 주는 거야. 안 붙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 눈에 노력 덜 한 애밖에 안 돼. 그러니까 너희는 나처럼 되지 말라고.”1)  


 현실로 복귀한 그의 대사는 결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이 놓인 위치를 묘사한다. 서완의 위치는 합격 결과로 결정된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자신의 인생에 관해 이야기할 권리를 얻는 것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이러한 맥락을 성원권으로 설명한다. 성원권이란 사회에서 호명될 수 있는 권리로, 집단에서 내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권리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되어 받아들여진 후에야 획득할 수 있다.2) 성원권은 ‘보통’과 ‘평범’의 존재라면 누구나 얻을 수 있지만, 이제 ‘보통’과 ‘평범’의 기준은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다. 20살에 대학에 입학해 무난하게 취업한 삶, 앞서 언급한 인생 계획표를 완수하지 못한 사람은 자퇴생, 고졸, 지잡대생, 취준생 등 여러 멸칭으로 묶여 사회에서 배제될 뿐이다.  

 집단 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최상위권 대학의 재학생이 아니라는 건 내 미래의 발목을 붙잡는 일이다. 학벌은 취업 결과로 이어져 또다시 나를 제한한다. 이는 청년 취업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 이력이 문제가 되어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재창업에 도전해도, 코로나19 긴급경영지원을 신청해도, 과거 실패 경험 때문에 보증금을 받지 못한다.3) 한 번의 실패가 다음 실패를 예견한다. 한 번의 도전이 삶의 불안전성을 심화하는 악순환이다. 낙인은 일종의 처벌로 작동하며, 이를 경험한 우리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성공을 갈망한다. 도전의 기회는 유일하고,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겁다. 정상성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열망이 점차 짙어진다.

 이러한 연쇄적인 결박을 지적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나의 항변은 사회에서 ‘패배자의 열등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부조리한 구조를 논하고 타파할 수 있는 건 이미 성공해 패배 의식이 없는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또 다른 업적이자 능력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 결국 성공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다.


 STAGE 3. 실패해도 되는 세상?

 모든 걸 내려놓는 일도 쉽지 않다. 성공 없이 살고 싶은,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허용될 수 없는 ‘욕심’이다. 이쯤에서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거다. 뭐 그렇게 사회 탓만 하냐고. 물론 모든 원인이 사회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가 이 구조를 변혁하려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2018년부터 매년 ‘실패박람회’를 진행하고 있다. 실패박람회는 국민의 재도전을 격려하고, 실패 인식을 바꾸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4) 참가자들은 창업 실패 경험을 공유하고 재도전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며, 실패 극복을 위한 정책을 마련한다. 하지만 실패박람회는 인식을 재고하기는커녕 성공과 실패의 경계를 강화한다. 이 박람회에서 실패는 ‘극복’해야 하고, ‘자산화’해야 하는 과거일 뿐이다. 재도전 전문가 역시 재도전을 위한 삶의 기반 마련에는 무관심하다. 이들은 개인회생 신청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실패에서 재기에 성공하는 10가지 조건’을 해결책이라며 내민다.5) 실패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고 외치며 내놓은 결과가 고작 ‘청년 소상공인 실패방지’ 같은 정책들이다.6) 이제 실패는 ‘방지’해야 할 대상으로, 아예 예방까지 한다. 결국 사회 인식 변화는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 2022 실패박람회 다시 ⓒ행정안전부

 실패 담론은 사회 구조에 내재한 생산주의와 엘리트주의, 관료제적 문화에서 비롯된다. 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 없이 담론의 재생산을 막을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는 실패하고 낙오된 이들에게 다시 성공할 수 있다고 응원하지만, 그들이 정말 실패했는지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인식 변화가 실패 담론을 극복할 수 있다며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우리의 존재를 제대로 말할 단상조차 내어주지 않는 사회에서 ‘두려워 말고 도전하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삶 하나 제대로 일궈내지 못한 개인을 사회는 보지 않는다.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성공을 좇을 수밖에 없다.


 FINAL STAGE. 여기가 끝이 아니지 않을까?

 사실을 고백하자면, 아직도 가끔 이불을 찬다. 더 좋은 대학에 간 이들이 부러워서. 패배감은 옅어졌지만 언제나 친구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1년만 일찍 들어왔다면 조금 더 만족하고 다녔을 거란 생각도 든다. 명문대 졸업생도 쉽게 가지지 못하는 아이비리그 박사 학위라든가 노벨상이라도 타야 이 감정이 해소될 것 같다. 결국 새로운 성공을 통해 실패를 만회하고 싶다는 의미다. 변한 건 없다. 사회는 문제를 답습하고, 그냥 고꾸라지기를 선택한다.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 시류에 탑승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회는 나와 복잡하게 얽혀있고, 내가 직면한 상황은 온전히 내가 초래한 결과가 아니다. 누구 하나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위로할 수도 있다. 나의 경험은 그냥 나를 구성할 뿐이라고. 실패에는 절대적인 기준도 고정적인 실체도 없다. 죽도록 작성했던 오답 노트 덕에 성적이 올랐다거나, 좌절한 내게 운명처럼 희망이 찾아왔다는 식의 위로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애초에 그런 변환점은 내게 없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시간이 지나 감정이 사그라진 후에야 보이는 사실이 있다는 거다. 살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시간을 마주치기 마련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은 흐르고, 고통은 희미해진다. 성공으로 인정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실패라고 부를 것도 없다. 어차피 모든 건 다 가정일 뿐이다.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하다. 공감이 가는 안타까운 사연이었을까, 아니면 한심하고 볼품없는 방황기였을까. 당신은 나의 경험을 성공과 실패 중 무엇으로 바라봤을까. 나는 사회가 아닌 당신의 기준이 궁금하다. 사실 기준이란 영원하지 않다.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경험은 분류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생성하기를 반복한다. 지금은 ‘21세기 실패담’에 속한 내의 경험도 나중에는 어떻게 정의될지 알 수가 없다. 성공과 실패에 속하게 될 수도, 혹은 그 무엇도 아닌 어딘가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나’다. 타인의 기준, 비난과 칭찬은 의미가 없다. 스스로 비판하고 위로해야 한다. 주저앉은 자신을 잠시 기다려 주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넌지시 물어보는 게 전부라는 뜻이다. 실패는 극복해야 할 패배도, 성공을 향한 도약도 아니다. 가끔 위축됐다가, 틈틈이 사회를 바꾸려 시도했다가, 다시 절망했다가, 위로도 받다 보면 시간은 훌쩍 지난다. 오늘의 내가 보지 못한 걸 그때의 내가 보여줄 것이다. 과거의 나는 보지 못했으나 지금의 나는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다시 일어나면 된다.



1) 이재규(감독). (2023).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드라마]. 넷플릭스.

2) 김현경. (2015). 사람, 장소, 환대. 서울: 문학과지성사.

3) 이완기·박진용. 「“실패자 딱지는 코로나 지원도 박탈···험로 여전한 재도전”」. 『서울경제』. 2022.03.10. https://www.sedaily.com/NewsView/263COJEW7N(2024.02.02.접속).

4) 2022 실패박람회 다시. 2022 실패박람회 홈페이지. 『행정안전부』.https://www.failexpo2022.com(2024.01.27.접속).

5) 재도전 상담소 다시클리닉. 사업을 그만두어야 하나요, 암울한 인생이여. 『행정안전부』. https://www.failexpo2022.com/dasiclinicPosting/2802(2024.01.27. 접속).

6) 2022 실패박람회 다시, 앞의 글.



참고문헌

김현경. (2015). 사람, 장소, 환대. 서울: 문학과지성사.

이완기·박진용. 「"실패자 딱지는 코로나 지원도 박탈···험로 여전한 재도전"」. 『서울경제』. 2022.03.10.

https://www.sedaily.com/NewsView/263COJEW7N(2024.02.02.접속).

이재규(감독). (2023).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드라마]. 넷플릭스.

이하영. 「“무슨 낯으로 고향에 가나요“…취준생은 ‘방구석 죄인’」. 『서울신문』. 2018.09.21.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921500218&wlog_tag3=naver(2024.01.26.접속).

재도전 상담소 다시클리닉. 사업을 그만두어야 하나요, 암울한 인생이여. 『행정안전부』. https://www.failexpo2022.com/dasiclinicPosting/2802(2024.01.27. 접속).2022 실패박람회 다시. 2022 실패박람회 홈페이지. 『행정안전부』. https://www.failexpo2022.com(2024.01.27.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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