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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맥교지편집위원회 Nov 17. 2024

[87호][사회] 언제나 사랑해

수습위원 박다인

[87호][사회] 언제나 사랑해1)


사랑받는 동물

 까맣고 작은 귀와 안아주고 싶은 몸집, 이름하여 바오 패밀리! 그중 ‘푸바오’는 최고의 인기를 보여준 슈퍼스타다. 중국으로 돌아갈 때 수많은 팬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푸바오는 한국에서 ‘사랑받는’ 동물이었다. 한편, 부경동물원에는 비쩍 마른 모습으로 인해 ‘갈비 사자’라고 불리는 ‘바람이’가, 번화가의 실내동물원에는 라쿤이, 민간 관광농원에서 20년 동안 갇혀있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사살된 사자 ‘사순이’가 있었다. 사자의 멋진 갈기, 라쿤의 귀여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동물마냥 열악한 환경에서 죽어 나갔다.

 ‘사랑’은 이들의 삶을 순탄하게 만들었을까? 푸바오는 한국에서 태어난 첫 자이언트 판다지만, 언제까지나 ‘연구용’으로 ‘대여’했기 때문에 고향 중국으로 반환되어야 했다. 물론 출생도 쉽지 않았다. 푸바오의 엄마 ‘아이바오’의 출산은 쇠창살과 시멘트 바닥으로 만들어진 지하 내실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이 판다에게 주어진 휴식 공간이기 때문이다. 판다가 ‘사랑받고 소중한’ 존재라면, 어째서 고향을 떠나 머나먼 곳에서 출산을 강요당하는 걸까?

     

▲ (좌) 3살 생일상을 받은 푸바오 ⓒ시공주니어|(우) 좁은 공간에 갇혀 비쩍 마른 모습의 ‘바람이’ ⓒ청주동물원

 이 목숨들은 멋지거나 귀엽다는 외형적 특성으로 인해 우리 안에 갇혔다. 이들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여겨지는 외양이나 성격조차도 인간 동물에 의해 만들어진다. 비인간 동물을 삶의 주체가 아닌 단지 ‘귀여운 존재’로 환원해 대상화한다. 에버랜드에서 지내는 판다 가족 역시 쉽게 ‘귀여운 존재’이자 ‘이윤 수단’으로서 대상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중국의 ‘판다 외교’와 연관한다. 중국은 멸종위기종인 판다가 상징하는 ‘생명의 취약성’을 수호하는 한편, 판다를 외교적 ‘선물’이나 ‘연구’ 목적으로 타국에 보냄으로써 국익을 취한다. 이에 따라 판다는 강제로 각국에 이주하며, 종 보존을 위해 교배 당한다. 하지만 감금 사육하는 판다 수가 늘어나는 동안 야생 판다를 보전하려는 노력은 지지부진하다. 번식 정책으로 급증한 판다 중 야생으로 방사된 이들 또한 고작 11마리에 불과하다.2)

 반대로 ‘귀엽지 않은’ 비인간 동물은 가치가 떨어진 ‘상품’처럼 버려진다. 2023년, 부경동물원은 실내 사육장 안 비인간 동물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 폐쇄했다. 폐업 직전까지 아무런 대책 없이 운영되다 처리하기 까다롭다는 이유로 내팽개친 것이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려진 비인간 동물의 일생은 인간 동물에 의해 끔찍하게 말살된다. 일련의 일들은 비인간 동물이 ‘사랑받거나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폭력이며, 단지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원’은 비인간 동물에 대한 대상화가 두드러지는 공간 중 하나다. 비인간 동물을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상품’으로 가정해 ‘보기 좋게’ 동물원에 전시한다. 기존 서식지와 비슷하게 전시 환경을 구성하거나 습성에 맞게 내부설비를 마련하는 것이 그 예다. 기존 서식지와 유사해 보이는 시설 환경이 각 종의 특성에 걸맞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전시를 위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미 기만이다. 그 점을 제외하더라도 비인간 동물은 이러한 전시 과정에서 ‘아름답고’ ‘흉포하며’ ‘사랑스러운’ 동물로 이미지가 고착되며, 마치 각 동물의 본질적인 특성처럼 여겨진다. 동물원의 전략은 이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생물종간의 차이를 입맛에 따라 세세히 나누는 한편, 거시적 차원에서는 ‘동물’이라는 단일한 기호로 그들을 억압한다. 자연에 대한 수집과 분류의 욕망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나, 현재는 그에 더해 상품을 통한 영리 추구로까지 이어진다. 


종차별의 역사

 근대 이전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의 관계는 현재와 달리 위계적이지만은 않았다. 인간 동물에게 비인간 동물은 때로 숭배의 원천이자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함께 살아가는 동료였다. 이집트는 농사를 방해하는 쥐의 천적인 고양이를 신격화했고, 단군신화는 곰과 호랑이에 대한 숭배의 역사를 보여준다. 또한, 기독교에서 염소는 악마를 상징하는 불길한 존재로, 뱀은 속임수와 악의 은유로 쓰였다. 무리 생활을 하는 늑대와 인간 동물은 비슷한 특성 및 선택압3)에 따라 서로를 길들이며 공존하기도 했다.

         

▲ (좌) 고대 이집트 고양이 미라를 담던 관 ⓒ동아일보|(우) 미켈란젤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는 뱀의 형상

 그러나 근대 과학의 탄생과 함께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은 명확하게 구분되기 시작했다. 이들을 구분 짓는 척도는 ‘이성’이었다. ‘이성’은 ‘인간’만의 것으로 여겨졌다. 반대로 ‘동물’은 이성이 없는 존재로서 열등한 대상으로 인식됐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비인간 동물을 ‘자동기계’에 비유했다. 기관의 배치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라면 감정 표현은 물론, ‘이성적 사고’ 역시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동물’을 더 이상 ‘살아있는 것’으로 분류하지 않으며 ‘인간’의 착취는 정당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신체보다 정신을 우위에 두는 이분법은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불러왔다. ‘이성’을 따르는 인간은 논리적인 사고에 따라 사물을 분류하고 설명할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단지 인간의 우월성 강조로 그치지 않고, ‘인간중심주의’라는 이름으로 깊게 뿌리 박혔다.

 인간을 중심에 두는 인지 방식은 동물종 분류 체계와 동물원의 전시 코스는 물론, 비인간 동물 관련 담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인간 동물을 학대하면 안 된다는 명제는 ‘인간’의 도덕성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는 무르고 약한 존재, ‘인간’에게 ‘보호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지는 ‘동물’. 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이성의 판단에 기초한 숙명이자 당연한 의무였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고결한 인간의 품위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었다. 이렇듯 비인간 동물을 향한 타자화는 ‘인간’과 ‘동물’을 각각 ‘주체’와 ‘사물’로 철저히 분리하는 데에서 기인했다.

 이러한 종차별 사고는 인간 동물의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소위 ‘불쾌한’ 동물인 쥐, 벌레, 세균 등은 인간 동물의 폭력성을 자극하는 비유물로 대표되거나, ‘돼지’나 ‘개’를 인간 동물로 비하하는 말로 사용한다. 하지만 비인간 동물은 무언가를 ‘낮잡아’ 부르는 데에만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비인간 동물은 소장할 수 있는 것으로, 펫숍에 진열된다. 귀여움과 같은 ‘본질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는 작은 크기로 외형을 개량하고 대량 생산한다. ‘인기 있는’ 비인간 동물을 캐릭터화한 상품을 제작해 판매하기도 한다.

 인간 동물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종차별 사고는 비인간 동물을 상품화해 ‘소비’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비인간 동물과 ‘관리’될 수 있다는 속성의 연결은 그 자체로 물화를 의미한다. 비인간 동물의 삶은 끊임없이 부차적인 것이 되어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


▲ (좌) 웰시코기의 본래 특성이라 여겨지는 ‘귀여운 외형’을 위해 꼬리를 자르는 과정 ⓒ머니투데이|(우) 진열장에 갇혀 판매되는 비인간 동물들 ⓒ한겨레뉴스


갈 곳 잃은 비인간 동물

 인간 중심 사회에서 비인간 동물의 생존 공간은 철저히 구획된다. 인간 동물의 ‘재미’를 위해 동물원에 살며, ‘식량’이 되기 위해 공장식 축산 농장에 가둬진다. 인간 동물의 ‘외로움’을 달래줄 개체로서 키워지거나, 인간 동물의 ‘안전’을 위해 완전히 동떨어진 자연에서 살아야 한다. 이 조건에서 벗어나 도시로 발을 들인다면 포획된 채 정해진 생존 공간으로 이동되거나 보이는 즉시 사살된다. 일례로 ‘유해 동물’로 지정된 멧돼지나 고라니를 포획하면 포상금을 지급된다. 이는 비인간 동물이 인간 동물의 생활 공간에 ‘침범’할 시 ‘치워야 한다’는 오랜 관습이 제도에까지 반영되었음을 의미한다.4) 책임을 물을 ‘주인’이 없는 ‘야생동물’은 삶의 터전에서 손쉽게 사라질 수 있다. 인간 동물이 멋대로 정한 규칙은 비인간 동물의 자유로운 삶의 권리를 앗아가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비인간 동물에게 ‘허락’된 공간은 협소하기 그지없다. 인간 동물의 편의와 이익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인공물은 비인간 동물의 생활 가능성을 없앤다. 도로 근처에 거주하는 비인간 동물은 끊임없이 죽음의 문턱을 오간다. 최근 5년간 발생한 동물찻길사고, 즉 로드킬은 약 6천 건에 달했다. 지자체 등 여러 단체에서 해답으로 제시한 생태통로는 단절된 생태계 연결 및 로드킬 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하지만 국립생태원의 ‘경기도 생태통로 이용 효율 평가’에 따르면, 제구실하는 생태통로는 103개 중 단 23개뿐이었다. 미흡한 현장 조사와 주 이용객의 이동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은 실효성을 떨어뜨렸다. 게다가 몇몇 생태통로는 인간 동물의 산책길로 사용되며, 비인간 동물을 위한 공간에서조차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다.5) 비인간 동물의 생존과 이동에 대한 쟁점이 흐려진 지금, 단순히 로드킬을 줄이려는 조치로서의 생태통로는 ‘탁상행정’에 불과하다. 넓은 서식지가 요구되는 이들에게는 터전을 가로지르는 도로도, 생태통로와 같이 파편화된 ‘자연환경’도 생을 위협하는 요소일 뿐이다.


▲ 생태통로로 조성된 공간에 울타리와 쉼터를 설치해 산책로를 만든 모습. 생태통로 인근에 인간 동물의 왕래가 있으면 비인간 동물이 이용할 수 없다. ⓒ한국일보
▲ 비인간 동물을 생태통로로 이끄는 유도 울타리가 주변과 이어지지 않은 모습. 전체적으로 유도 울타리를 설치해야 비인간 동물이 육교로 인지하고 건널 수 있다. ⓒ한국일보

 일련의 일들은 인간 동물의 영역 확장에서 기인한다. 지구는 인간 동물만의 공간이 아니며 모든 동물의 발원지이지만, 인간 동물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생활 범위를 지속적으로 늘리며 비인간 동물의 존재를 지워나갔다. 인간 동물이 자행한 ‘분리’는 생태계 파괴와 연결된다. 인간 동물은 ‘가축’을 밀집 사육하고, 사료 재배를 위해 대규모로 삼림을 벌채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종의 삶의 터전은 끊임없이 탈취당한다. 하지만 ‘탈취’에는 ‘접촉’이 수반된다. 기존에 서식하던 생명체를 포함해 모든 환경과 ‘접촉’하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바이러스에 감염되기도 한다. 인간 동물 역시 침범당하고 연루되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와 같은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태계란 인간을 포함해 모든 동물, 식물, 곤충, 박테리아, 흙, 먼지 등이 다 함께 섞여 있는 곳이다. 자연 착취, 인간이 살해하고 파괴한 수많은 생명은 뒤이어 기후위기라는 재난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지배하고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비인간 동물, 자연, 그리고 지구는 우리와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일원으로서, ‘인간은 지구’이고, ‘인간은 자연’이며 ‘인간은 비인간 동물’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공진화를 위해

 그렇다면 이제 이 세계를 지금과는 다르게, 비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 볼 시간이다. ‘종차별을 반대한다’라는 선언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욱 적극적인 환대와 연대를 표명하도록 말이다.

 강원도 인제에는 ‘꽃풀소 보금자리(달뜨는 보금자리)’가 있다. 꽃풀소 보금자리는 2021년 도살 직전 구조된 소 여섯 명을 보호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생추어리(Sanctuary)’다. 생추어리는 ‘인간의 착취와 학대에서 구출된 이들의 안식처’로, 비인간 동물 역시 온전히 자기의 삶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한다.6) 비인간 동물에게 주어진 비좁은 공간을 벗어나, 넓은 들판처럼 자유롭게 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등 공존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2020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새벽이 생추어리’7) 이후 점차 그 수를 늘려 가고 있다.

 한편 우리는 이런 공간을 주목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이런 공간이 ‘왜’ 만들어졌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생추어리는 완벽한 공생의 장이 아니다. 다만 비인간 동물이 그 자체로서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왜 특별한 공간이 조성되어야만 비인간 동물이 ‘그들답게’ 살 수 있는지, 왜 이러한 공간에서도 인간 동물의 돌봄이 남아있는지, 혹은 사육과 돌봄의 차이는 무엇인지, 나는 누군가와 함께 서로를 위한 돌봄을 지속하고 있는지 등, 우리는 끝없이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의 관계에 관해 물음을 던져야 한다. 지금껏 무지했던 관계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가능성’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추어리와 같은 공간은 이윤 추구와 개발 욕망이라는 여러 위협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생추어리 조성을 추진해도,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며 이익 수단으로 만들려는 지자체 앞에서 생추어리는 또 다른 ‘이색’ 동물원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8) 비착취라는 가치를 상실한 생추어리에서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이윤의 목적에서 벗어나, 생추어리 본래의 정의가 지켜질 때 ‘함께’의 의미가 실현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지구의 생명체들은 ‘공진화’9)하며 함께 살아오고 있다. 모든 동물과 바이러스는 면역 체계와 돌연변이를 만들며 서로의 대응에 맞춰 진화한다. 꽃의 개화와 꿀벌의 활동 시기는 맞물리며, 모든 동물의 배설물은 땅으로 돌아가 식물의 생장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인간 동물은 현재까지 ‘함께’가 아닌 일방적인 폭력으로 영역을 분리해 우열을 논하고 있다. 인간 동물 역시 먹고 먹히며 감염되고 죽어서 퇴비가 되는 ‘지구의 존재’일 뿐이다. 지구에서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생명체들과 다를 바 없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10) 인간중심의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이 서로 얽혀 관계 맺는 생추어리처럼 공생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굴하는 것이다. 피상적인 관심과 대상화가 아닌 새로운 사회로의 확장을 목표로 “그들의 우주를 되찾아주는 것.”11) 지금, 분리된 세상을 연결해야 할 때다.

 


1) 본고는 인간을 중심에 두는 종차별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국립국어원은 마리는 ‘짐승이나 물고기, 벌레 따위를 세는 단위’로, 명은 ‘사람을 세는 단위’로 정의한다. 비인간 동물과 인간 동물을 헤아리는 단위의 언어적 차이는 현실로 이어진다.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라는 가정을 당연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라는 종차별적 표현 대신 ‘목숨 명(命)’을 통해 비/인간 동물을 통틀어 하며, 같은 맥락에서 동물은 ‘비인간 동물’로, 인간은 ‘인간 동물’로 통칭한다. ‘동물’과 ‘인간’ 모두 동물이지만, 언어의 차원에서부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동물적인 것’에서 분리되는 존재로서 두 범주의 차이를 부각해 왔기 때문이다.

2) 남종영. 「‘푸바오 열풍’에 가려진 판다 공장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한겨레신문』.

2024.03.28.

3) 자연선택에서 개체군에 작용해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지니고 증식을 재촉하도록 하는 생물적‧화학적‧물리적 요인을 말한다.

4) 이현우. 「푸바오가 진정 있어야 할 공간은 어디일까」. 『오마이뉴스』. 2024.04.23.

5) 최은지‧오혜연. 「[동물보호 기획-②] 생태통로, 도로 위 생사의 갈림길」. 『연세춘추』. 2023.09.11.

6) 신다은. 「생추어리 사는 소들은 바나나 먹으며 오후를 즐긴다」. 『한겨레21』. 2023.04.21.

7) ‘새벽이 생추어리’는 농장에서 공개 구조된 ‘새벽이’와 실험동물로 길러지다 구조된 ‘잔디’가 사는 곳이다. 새벽이는 환삼덩굴, 바랭이풀을 즐겨 먹으며 신이 날 때는 쏜살같이 내달린다. 잔디는 진흙목욕을 즐기고 호불호가 분명해 좋아하는 음식을 먼저 먹고 싫증 난 채소는 아예 남기기도 한다. 이처럼 ‘새벽이 생추어리’는 비인간 동물이 감정과 욕구가 있는 존재로서 인간 동물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며 그들의 해방을 표명하는 곳이다.

8) 서혜미. 「동물, 죽은 것은 어디나 있지만 산 것은 좀체 보기 어렵다」. 『한겨레21』. 2023.04.28.

9)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진화하는 것.

10) 주기화. (2022). 신유물론, 해러웨이, 퇴비주의. 비교문화연구. 65. 127쪽.

11) 서혜미. 「우리 시대 동물원의 모습은」. 『한겨레21』. 2024.06.14.



참고문헌

김철호. (2023). 혐오, 비인간화, 악마화의 의미. 기전문화연구. 44(2). 117-138.

남종영. 「‘푸바오 열풍’에 가려진 판다 공장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한겨레신문』. 2024.03.28.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34134.html (2024.08.18. 접속).

서혜미. 「동물, 죽은 것은 어디나 있지만 산 것은 좀체 보기 어렵다」. 『한겨레21』. 2023.04.28.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3750.html (2024.08.01. 접속).

서혜미. 「우리 시대 동물원의 모습은」. 『한겨레21』. 2024.06.14.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651.html (2024.08.01. 접속).

신다은. 「생추어리 사는 소들은 바나나 먹으며 오후를 즐긴다」. 『한겨레21』. 2023.04.21.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3718.html (2024.08.03. 접속).

이현우. 「푸바오가 진정 있어야 할 공간은 어디일까」. 『오마이뉴스』. 2024.04.23.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22312 (2024.08.01. 접속).

주기화. (2022). 신유물론, 해러웨이, 퇴비주의. 비교문화연구. 65. 117-146.

최은지‧오혜연. 「[동물보호 기획-②] 생태통로, 도로 위 생사의 갈림길」. 『연세춘추』. 2023.09.11. https://chunchu.yonsei.ac.kr/news/articleView.html?idxno=30356 (2024.08.10.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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