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기다리던 주말, 눈꺼풀 사이로 해가 쏟아지면 침대에서 일어난다. 냉장고를 뒤적거려 밥을 차려 먹고 양치와 세수를 한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정리한다. 그중 몇 개는 세탁기로 향한다.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청소기를 돌린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과제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면 샤워하고 잠에 든다.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움직였지만 이런 나에게 돌아오는 건 ‘일은 언제 할 거니?’라는 질문이다.
노동은 무엇인가
노동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정의는 자본주의 지배 계급이나 지식인에 의해 주로 생산되어 왔다. 라틴어 labor(고역), 독일어 Arbeit(고생), 히브리어 avodah(노예), 단어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 노동은 고된 노역이 수반되는 활동으로서 오랜 시간동안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1) 주로 농민이나 장인이 수행하는 육체노동이 이러한 인식에 속했다. 반면, 전문 지식을 요구하거나 문예를 창작하는 정신노동은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정신적 활동과 노동을 별개로 인식하며 정신노동을 고귀하고 우월한 것으로 여겼다.
이는 지배계급의 정신적 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에서 기인한다. 지식과 교육을 차별화해 육체노동을 지적활동과 분리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에 우열을 나눔으로써 육체노동자들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 행사를 차단하고, 계층 간 이동을 어렵게 만들어 자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러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은 실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지배계급의 권력 정당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예시로 악기장은 좋은 악기를 제작하기 위해 악기의 구조와 음향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최적의 소리를 위해 필요한 재료를 판단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목공은 목재의 특성을 이해하고 설계도를 읽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하며, 창의성도 자주 요구된다. 이처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경계는 모호하다.
산업화와 자본주의 사회로의 진입은 사람들에게 계층 간 이동 가능성을 제시했다. 자본의 소유량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에서, 경제 성장에 따른 물질적 자원 증가와 일자리 창출은 ‘노동을 통한 신분 상승’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 지배계급의 정신노동과 마찬가지로 ‘부유해질 수 있는 노동’을 할 수 있는 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금융, 의학, 법조계와 같은 고임금 노동 분야에서 일할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고비용의 특정 교육 과정을 거쳐야만 접근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자본을 손에 쥔 지배계급의 통제 아래 낮은 임금을 받으며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의 구별을 더욱 공고히 했다. ‘정신과 육체’에 따른 분류 외에도 ‘고임금과 저임금’,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다양한 형태로 구분지어 차등화했다.
노동할 수 있는 몸과 없는 몸
노동의 위계가 견고해지면서 노동 시장 진입은 한층 더 어려워졌다. 한국 사회는 잘 ‘기능’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요구한다. 이는 쉽게 망가지지 않으며, 자본의 부품으로 작동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신체는 노동할 권리조차 쉽게 얻지 못한다.
2020년 7월에 시작된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은 중증 장애인에게 노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 사업은 최중증 장애인2)과 탈시설3) 장애인이 권익옹호활동·문화예술활동·인색개선활동을 통해 ‘유엔 장애인 권리 협약’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요 직무는 장애인 편의시설 및 의료기관 이용 시 불편 사항 모니터링, 장애인 차별 해소를 위한 퍼포먼스, 장애인 인식 개선 활동 등으로 구성되었다.4) 20년 가까이 병원에서 지내던 이성용 씨는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하며 장애인권익 옹호 활동을 했다. 그는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다 보니 그동안 일할 엄두도 못 냈다. 이 일을 하면서 통장에 돈이 쌓이니 든든하고, 경제관념도 생겼다.”라고 말했다.5) 이전에는 일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던 장애인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비로소 경제적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시설에서 나와 자립의 기회를 가지며, 생활고에서 벗어나 미래를 계획해 나갔다.
▲ (좌) 노들장애인야학 30주년 개교기념으로 브라질 타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노들쿵쿵차카차카’. ‘노들쿵쿵차카차카’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로 구성된 문화예술활동팀이다. ⓒ비마이너 (우) 장애경 씨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애인식 개선 강의를 하고 있다. ⓒ비마이너
그러나 2023년 6월, 서울시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집회·시위·캠페인이 포함된 권익옹호활동에 편향되어 있으며, 장애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라고 밝혔다.6) 또한 이러한 활동은 ‘노동’으로 볼 수 없다며 권익옹호활동 불가 방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장애 유형 맞춤 일자리로 AI 데이터 라벨링, 불법 저작권 침해 콘텐츠 모니터링 등을 제시했지만, 모두 기능 중심 업무7)로 실제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최중증 장애인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결국 특정한 수행력을 갖춘 소수에게만 노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최중증 장애인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고, 2024년 서울시가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 장애인 공공 일자리 사업은 한순간에 폐지되었다.
노동할 권리를 빼앗긴 주체는 비단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직장 내 여성들은 임신과 동시에 해고 통보를 받기도 한다. 해고당하지 않더라도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사용하기는 어렵다. 편의를 봐줄 수 없다는 이유로 임신 및 육아휴직 사용이 거부되며, 인사 평가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는다.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8)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직장 내 입지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임신 노동자들이 연차 사용조차 해보지 못한 채 부당한 과다 업무 지시로 유산을 겪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성질환이나 정신질환은 병력 자체만으로 결격사유가 되기도 한다. 아픈 경험이 있거나 현재 아픈 몸은 언제든 악화될 수 있다고 여겨져 업무에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자 범주에는 우울증, ADHD, 불안장애 등 다양한 질환이 포함된다. 이는 결코 특별하거나 대단하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질병이나 장애를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정상적인’ 몸을 기준으로 노동 조건을 설정하고, 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노동 시장에서 배제한다. 사회의 노동 조건과 차별적 인식은 시장에서 배제된 이들이 기초 생활조차 영위하기 어렵게 만든다. 현재의 노동은 극소수를 위한 것일 뿐이다.
진정한 노동은 없다
견고한 노동의 위계를 허물기 위해선 노동 개념을 ‘임금 노동’이라는 좁은 범위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만약 경제적 대가를 창출하는 것을 넘어 일상에서 행하는 모든 활동을 노동으로 간주한다면, 사회가 구축해 온 노동의 위계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청년층에는 구직 활동을 단념한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의 비중이 점점 늘고 있다. 니트족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교육, 취업전선에 뛰어들 의지가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한다.9) 통계에 따르면 지난 7월 기준 대학 졸업 후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400만 명을 넘어섰다. 그 가운데 15~29세 청년층 중 구직하지 않고 ‘그냥 쉰다’라고 응답한 비경제활동인구는 약 59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천 명 증가했다. ‘그냥 쉰다’라는 항목은 취업이나 실업 상태가 아닌 단순히 ‘일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청년에게 열린 취업 문이 계속해서 좁아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10) 인구는 점점 줄어듦에도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청년층의 비중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길어지는 무직 기간은 취업 시장에서 일종의 편견으로 작동한다. ‘어딘가 문제가 있어서’ 여태껏 취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취업에 성공한 청년층의 상황도 좋지만은 않다. 고용 안정성과 임금 등에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청년층의 취업과 고용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청년들은 ‘일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여기, 숨 막히는 요구에서 벗어난 회사가 있다. ‘니트컴퍼니’는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관계망이 부족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가상의 회사이다.11)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며. 새로운 형태의 노동 공간을 지향한다. 입사는 지원자가 면접관이 되어 회사에 관해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입사자들은 100일 동안 일반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낸다. 출근 후에는 일일 업무를 스스로 정해 업무 기술서를 작성하여 근무를 시작한다. 청년들은 그림 그리기, 글 쓰기, 만 보 걷기, 강아지 관찰하기, 주짓수 배우기 등 자신만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몰두한다. 관심사가 비슷한 입사자들은 취미 생활을 공유하고 관계를 이어 나가는 사내 클럽 활동을 한다. 지역 내 명소나 맛집 탐방과 같이 외부 활동이 있는 날은 외근을 나가기도 한다. 박은미·전성신 니트컴퍼니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가뜩이나 일이 없어지고 있는 시대잖아요. 기존의 노동시장으로 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왕이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청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야 따라오는 후배들도 ‘저런 길도 있었네’라며 선택지를 넓게 볼 수 있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12)
니트컴퍼니는 일과 노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단순히 경제적 대가만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이 아닌,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활동들을 일로 정의한다. 일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임금이 전부가 아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소속감,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유대감. 때로는 임금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일은 단순히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될 수 없다. 배제되어 온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생산성과 이익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일의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노동이다. 임금이 없어도 우리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노동이기에 노동의 위계를 나눌 수 없고, 진정한 노동 또한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노동한다. 밥을 짓고, 방을 치우고, 책을 읽고, 식물에 물을 주고, 산책하고…. 이렇게 일상적인 활동들을 하면서.
1) 김광연. (2021). 노동의 가치와 그 함의들.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40(3), 123쪽.
2) 최중증 발달장애는 일상생활, 의사소통, 행동 중 적어도 2가지 이상의 기능 제한이 있으며, 상당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를 의미한다.
3) 탈시설은 단순히 ‘시설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넘어 수용과 통제, 감시의 역사 속에서 존엄을 되찾는 과정이다. 시설은 필요한 보호를 제공하기보다 장애인을 ‘정상인’과 분리해 사회에서 고립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애인 탈시설 운동은 장애 당사자의 탈시설을 권리로서 실현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립해 생활하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4) 박송이. 「70만원 남짓 월급으로 생애 첫 미래 계획...이젠 그 꿈도 접어야죠」. 『주간경향』. 2024.02.05.
5) 정한솔. 「[이슈 In] ‘고용 사각지대’ 중증장애인, 그들도 일할 권리가 있다」. 『연합뉴스』. 2022.09.12.
6) 김송이. 「“나도 일하고 싶어요”삭발 나선 중증장애인 해고노동자 이영애씨의 외침」. 『경향신문』. 2024.04.19.
7) 기능 중심 업무는 물건을 포장할 수 있는지, 주어진 시간 동안 어느 정도 양의 일을 할 수 있는지와 같은 특정한 기술이나 능력을 요구하는 작업을 말한다.
8)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은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을 이유로 해고 등 불리한 처우를 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9) 문가영 외. 「“그냥 쉬거나 쪼개기 알바”...코로나 풀려도 구직난 허덕이는 청년들」. 『매일경제』. 2022.09.25
10) 김수현. 「“높은 취업장벽에 좌절”…니트족 증가」. 『매일경제』. 2024.05.19.
11) 김보미. 「고립 청년들의 세상 나들이...‘니트컴퍼니’직원들의 하루」. 『경향신문』. 2023.11.02.
12) 김경미. 「“월급 없어도…가상 회사서 청년의 꿈 키우죠”」. 『서울경제』. 2024.01.01.
참고문헌
김광연. (2021). 노동의 가치와 그 함의들.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40(3), 12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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