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게
이름 모를 감정의 서두
그럴 때가 있다.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내려앉는 기분. 비관적인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느낌.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불안. 그것들이 쌓이다 보면 마음엔 고름이 찬다. 하지만 짜내본 적은 없다. 일기장에 몰래 적어놓거나 언젠가 은연중에 사라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만을 꺼내 든다. 어디론가 침잠하는 이 감정은,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제대로 내보인 적 없다. 이런 이야기를 과연 누가 좋아할까? ‘난 요즘 살기 싫어. 아니, 사실 오래전부터 그랬어. 언제나 고통스러운 삶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그냥 이제 지친 것 같아.’ 쓸모없고 기분 나쁜 이야기, 자조적인 언어로 삼켜버리고 다시는 들추지 않는다. 애초 이 감정을 표현했을 때,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었던 것 같다. 이겨내라며 낙관적인 이야기만 하는 사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아예 피해 버리는 사람. 남의 이야기에 별 관심도 없고 이해도 못 하는 사람. ‘내가 이상한 건가 봐.’ 그렇게 얼렁뚱땅 마무리하면 내 마음의 고름은 더 커진다. 사람들이 이상한 건 아닐지, 혼란 속에서 자기연민만 하다가 끝나는 감정. 난 아직도 이 감정의 이름을 모르겠다.
우울이 대체 뭐길래
슬프고, 무기력하고, 초조하다. 누군가가 툭 던진 말에 쉽게 예민해지고 화가 난다. 슬픔과 분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한순간에 모든 의욕을 상실한다. 사는 게 재미없다. 혼자 있고 싶다. 하지만 외로우면 마음속이 공허해지고 불안해진다. 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데 행복에 매여 살려는 것부터 불행한 것 아닐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지만 그러다 ‘실패자’가 되어버릴까 두렵다. ‘정상적인 사람’과 ‘실패자’라는 이분법이 나를 옥죄어 온다. 그냥 모든 게 싫다. 아니, 모든 게 싫어지기만 하는 것이 싫다. 복잡한 싸움 끝에 내린 결론은, 누군가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울리는 한마디. ‘아, 우울하다.’
나의 우울은 방향을 잃고 흐트러지는 형태를 띤다. 얽히고설킨 이 감정은 근원을 파악하기 어렵다. 불안하고 두렵고, 외로워지다가, 분노와 슬픔 사이를 헤매는, 이 느낌을 우울이라 칭해도 되는 걸까?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까? 어렵고 불분명한 이 감정을 함께 고민해 보았다.1)
Q. “가장 최근에 우울했던 적이 있다면?”
A. 딸기 : 나는 방금. (모두 웃음) 내 원고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어. 근데 막상 싹 다 고치라는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까 약간 충격? (살짝 고민하면서) 알고 있었지만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한 게 아니었나 싶어.
A. 귤 : 나는 기숙사 신청 놓친 날. 일단 그날 자체도 충격이 컸는데 (잠깐 생각하다가) 그 생각이 딱 드는 거야. 내가 지금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될 돈을 나가게 했다……. 이것 때문에 죄책감이 시작되고 이제 침전하는 거야. 난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중간에 끊지 않으면 끝나지를 않아서. (약간 웃음) 진짜 엄마 아빠한테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고……. 내 실수가 아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라는 생각 때문에 한동안 좀 침울해 있었어.
A. 키위 : 최근에 우울한 적? 진짜 없는데. (모두 감탄) 20대 초반에는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 미래 때문에 우울을 잘 느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서. 다양한 경험을 하다 보니 시야가 확장되고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이제는 쉽게 우울해하지 않는 것 같아. 우울해도 금방 극복하는 듯.
A. 사과 : 난 사실 우울을 되게 회피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뭔 일이 일어났어. 그러면 이제 세상이 날 억까하네? (모두 웃음) 이러고 개빡치는 거지. 화나고 슬프긴 한데 뭔가 그게 우울하다는 느낌인지는 모르겠어. 한순간 빡치고 회피하고를 반복하는 것 같아. 분출하지 않고 피하니 속에서 끊임없이 끓는 느낌?
A. 자두 : (고민하다가) 난 인간관계에서 우울감을 많이 느끼는데, 다른 사람들이랑 접촉하고 교류하면서 내 세계가 넓어진다는 게 피부로 와닿잖아. 그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에 관계에 변화가 생기면 괴리감이 되게 큰 거야. 새로운 감정이나 기분, 경험이랑 연결되는 모든 가능성들이 다 닫히는 느낌? 변화라는 건 뭐,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거나, 전처럼 자주 만날 수가 없다든가, 이런 거. 친구든 연인이든 그게 너무 힘든 것 같아.
A. 레몬 : 난 당연히 원고를 안 썼을 때. (점점 강조하면서) 너무 많이 미뤘을 때. 미루고 마주해야 할 때. 그리고 편집장이 너무 힘들 것 같다고 느꼈어. 화를 참고 있을 것 같아서. 어떡하지. 편집장 어떡하지. 내 글 어떡하지. (불안해하는 시늉)
Q. “왜 우울은 다른 감정보다 말하기 힘들까?”
A. 자두 : 예전에 읽은 책에서 슬픔은 사람들을 슬픔이라는 한 감정으로 결집하고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어쨌든 사회적인 이미지 차이 아닐까. 우울은 그에 반해 엄청 개별적이고 사회를 단절시키는 것처럼 느껴지고.
A. 레몬 : 슬픔은 뭔가 문학 작품에서도 많이 쓰이고……. (고민하다가) 안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나. 근데 우울은 좋게 쓰이는 경우는 없는 듯.
A. 귤 : 조금 다른 얘기일 수도 있는데, 구분이 잘 안 되지 않나? 슬픔이랑 우울이랑, 무기력함이랑 우울이랑...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을 안 해봐서 그런가.
A. 사과 : 그리고 뭔가 슬픔과 우울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겠고 구분하고 싶지도 않아. 힘들어서. (살짝 웃음)
서로가 느끼는 우울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누군가는 우울과 분노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우울을 잘 느끼지 않는 이도 있다. 우울의 원인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미뤄 놓은 일에서, 누군가는 끊긴 연락에서, 혹은 미안함에서 우울감을 느낀다. 우울의 결은 이토록 제각각이지만, 우울을 경험해 보지 않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우울을 단시간 내에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위처럼 짧은 대화에서도 우린 우울을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워 머뭇거리고, 조심스러워했다. 자세한 상황은 생략한 채 완곡한 표현으로 돌려 말하기도 했다. 확실치 않은 감정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자 시작한 자리였지만, 되려 고민만 늘어나고 말았다.
우울한 사회
우리는 왜, 누군가에게 우울을 꺼내기 힘들어할까? 사회가 우울을 ‘금기’로 여기며 통제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우울을 ‘비정상’으로 치부한다. 사회는 ‘건강’을 기준으로 ‘정상성’을 추구하는데, 우울은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여겨진다. 우울로 인한 높은 불안감, 집중력 감소 등 우울의 무기력함과 그에 따른 비생산성이 근거다. 이러한 특징은 ‘정상적’인 사회에서 불필요한 것이자 병리적 상태로 타자화된다.2) 질환일 뿐, 감정으로서 다뤄지지 않는다. 그저 질병의 증상이자 치료해야 하는 상태다. 이는 우울의 정도를 멋대로 감별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증세’가 느껴지지 않으면 유난 혹은 불평으로 여겨 멸시받기도 한다. 차별적 시선으로 인해, 사회 속 개인은 우울을 숨기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우울이 질환으로 여겨지기 이전에, 질환에 대한 차별과 타자화 자체가 문제임을 인지해야 한다.3) 질환을 신체 혹은 정신의 불안정성으로 보고, 함부로 연민하며 누구나 겪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는 정부와 같은 권력 기관의 행보를 따른다. 즉 정부에 의해 우울과 질환 등 여러 사회적 인식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정부는 우울을 ‘정신질환’으로 단순화하고 통계 수치를 줄이는 데만 힘쓰고 있다. 2023년, 윤석열 정부는 ‘정신건강정책안’을 발표했다. 이 정책안은 최근 우울증 환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살률을 절반 줄이는 것을 목표로 지정했다. 해당 안은 우울증을 중심으로 한 정신건강 인식 개선, 차별적인 언론 보도 기준 마련 등을 내세웠다.4) 문제는 정신건강 인식 개선 캠페인의 취지였다. 정신질환을 치료한 당사자를 홍보대사로 삼아, 질환의 ‘극복 가능성’을 알리겠다는 의도였다.5) 결국 우울을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질환을 수용하지 못하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회가 유지되는 한 일련의 정책은 무의미할 뿐이다.
임상우울증학회가 2024년에 진행한 ‘우울증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도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509명 중 80% 이상이 우울증 진료를 받은 적이 없으며 이 중 약 25%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본인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혹은 ‘주위의 부정적인 시선이나 편견이 걱정되어서’ 등이 주된 이유였다.6) 우울을 드러내기 어려운 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식 개선이다. 사회적 시선이 변화된다면, 주도적인 회복과 우울 표현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우울의 사회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점 역시 문제다. 정신질환은 특히 경제적 어려움을 원인으로 자주 발생한다. 또한, 불황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심리적 원인을 제외하면 가장 주요한 정신질환 유발 요인이다.7) 경기침체, 취업난, 근로 지위 상실 등은 연령층 대부분이 겪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상시 위기에 놓일 수밖에 없지만, 정부는 이를 방관하고 있다.
허술한 ‘정신건강정책안’을 내놓는 대신 근본적 원인인 우울을 다루어야 했다. 우울이 다양한 사회적 문제나 ‘정상‧비정상’의 위계로 인해 기피되고, 정신질환의 뿌리가 된다는 점을 말이다. 우울을 ‘호소’하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 이상 우울에 대한 논의는 시작될 수 없다. 정부는 우리의 우울을 사업 수단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장은 ‘건강’한 정신이 ‘생산성’을 높이고, 이는 ‘품격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이 될 것이라며, 해당 안을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밝혔다.8) 가시적인 수치 감소에만 급급한 사회에서 우울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까. ‘비정상적인 정신질환자’가 많은 사회에는 ‘품격’이 없다는 혐오만이 남게 될 뿐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우울을 공유하지 못하고 우울감은 더욱 깊어진다는 점이다. 우리에겐 고립된 우울을 말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우울을 있는 그대로 나눌 수 있도록 말이다.
눈물 공동체
일본에는 ‘루이카쓰(淚活, 누활)’라는 연대 활동이 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모임의 목적은 단지 ‘우는 것’이다. 민폐가 될까 함부로 울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며, 그들은 감동적인 동영상이나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9) 눈물로 정서를 공유하고 감정을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등,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긍정적인 취지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집에서 혼자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우는 것도 루이카쓰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눈물 공동체는 쌓인 감정을 해소해 안정을 얻고 싶은 사람의 존재를 의미한다. 감정적 여파로 눈물을 흘릴 때 스트레스 호르몬이 섞여 배출되는데, 울고 나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10) 루이카쓰의 창시자 역시 이혼식 행사를 진행하던 도중 마음껏 운 사람일수록 상쾌함을 느끼는 걸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11) 또한, 연대 활동에 참여하는 만큼 ‘같이’ 울고 싶다는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타인과 함께 감정을 나눈다면 혼자인 순간보다 훨씬 위로가 될 수 있다. 공동체라는 큰 울타리에서 정서적인 지지와 이해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참여자는 “눈물을 흘리는 건 벌거벗는 것과 비슷하며, 남에게 보이지 못할 모습을 보이는 상황이 되면 친근감이 솟는다”고 밝히기도 했다.12) 여기서 공동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바로 ‘눈물’이다. 눈물 공동체에서 눈물은 감정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연대 가능성은 우울이 숨 쉴 틈을 만들어, 표현을 가로막는 사회를 확장한다. 사회에 부족했던 위로와 공감을 통해 비방의 대상인 우울을 해소하는 것. 그것이 엄격한 사회 속 사람들이 바라는 ‘함께 우는 것’의 의미이다.
나 역시 ‘함께 우는 것’의 의미를 느낀 적이 있다. 재학했던 고등학교에는 늦은 밤 학교 예배당에 모여 같이 기도하는 ‘철야’가 있었다.13) 학교생활 중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우울함과 답답함을 눈물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부둥켜안으며 같이 우는 선‧후배, 동기들. 나만 우울하고 동떨어진 게 아닌,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따뜻함과 위로. 이는 감정과 눈물을 내보일 수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감상이다. 우리의 ‘우울’은 각자 다른 양상을 띠지만, 어떠한 잣대로도 구분할 수 없이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울을 터부시하지 않고 상대방과 같이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견디는 게 아닌 서로를 공감하고 마주할 수 있도록.
이러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감정 표현을 위한 공동체의 필요성을 간과한다. ‘루이카쓰’ 역시 이상적인 공동체는 아니다. 세미나 형식으로 운영되는 턱에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인위적으로 조성되기 때문이다. 타국의 집단이라는 점에서 참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눈물 공동체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찾아봐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사회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살아간다. 그만큼 우울을 감추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터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우울한, 우울할 누군가에게
이 글은 그저 나의 우울함을 서툴게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으로 우울을 대하길 바라며 쓴 글은 아니다. 고작 몇 자로 한정되기엔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는 감정이며 각자의 감상 역시 다르다. 하지만 우울을 있는 그대로의 감정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우울은 누군가가 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아직도 나의 우울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건 알지만, 아직도 우울을 감당하긴 버겁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이미지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릴까 봐, 아무도 모르게 평생을 숨겨온 모습이 들통날까 봐. 결국 ‘내’가 스스로 우울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움을 내려놓아도 괜찮아지길 바란다. 우울의 요인은 나에게만 있는 게 아님을 안다. 이제는 ‘비정상’으로 우울을 규정한 사회가 ‘정상’이었는지 의심해 볼 차례다. 정체한 사회는 ‘우울할 수 있는 사회’로 변화해야 한다. 지금 당장 우울을 받아들이지 않는대도 괜찮다. 우울을 대하는 척도는 저마다 제각각일 테지만 우울은 당신의 일부일 뿐, 당신의 모든 걸 대변할 수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무조건적인 포용과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우울을 비롯한 모든 감정이 당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모든 순간을 나로서 살아가기를.
1) 아래 발화는 독자가 생생하게 읽을 수 있도록 대화체와 당시 행위까지 덧붙여 서술하였음을 알린다.
2) 이진송. 「‘가장 보통의 존재’들이 ‘함께’ 걷는 우울」. 『웹진 1. 《비유》』. 2020.09.29.
3) 위의 글.
4) 조규홍. 「정신건강 정책 대전환, 국민이 행복한 나라로」. 『한겨레신문』. 2023.12.25.
5) 김경찬. 「(알기쉬운정책)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 『보건복지부』. 2023.12.05.
6) 문세영. 「“우울증 혼자 해결 가능”…우울한 성인 25%, 진료 의지 없어」. 『동아사이언스』.
2024.05.16.
7) 오상훈. 「경기 침체가 우울증 몰고 온다… 서울 시민 절반이 ‘우울’」. 『헬스조선』. 2023.10.30.
8) KTV 대한뉴스. (2024.07.12.). “정신건강 혁신, 5~10년 후 내다본 값진 투자”. KTV 국민방송.
9) 강윤화. 「펑펑 울면 ‘코로나 블루’가 싹…일본 ‘눈물 모임’ 엿보기」. 『일요신문』. 2020.06.11.
10) 위의 글.
11) 위의 글.
12) 이해영. 「“스트레스 풀려”…일본서 함께 모여 눈물 흘리는 ‘루이카쓰’ 확산」. 『연합뉴스』.
2018.01.19.
13) ‘기존 기독교의 철야 기도회’는 영적 충만감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필자가 나온 고등학교의 철야 기도회’는 종교적 목적보다는 학내 구성원이 눈물을 흘리기 위해 모이는 시간으로, 일종의 학교문화라는 점을 알린다.
참고문헌
강윤화. 「펑펑 울면 ‘코로나 블루’가 싹…일본 ‘눈물 모임’ 엿보기」. 『일요신문』. 2020.06.11. 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71986 (2024.07.10. 접속).
김경찬. 「(알기쉬운정책)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 『보건복지부』. 2023.12.05. https://www.mohw.go.kr/board.es?mid=a10503000000&bid=0027&list_no=1479142&act=view (2024.08.02. 접속).
문세영. 「“우울증 혼자 해결 가능”…우울한 성인 25%, 진료 의지 없어」. 『동아사이언스』. 2024.05.16.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65426 (2024.08.15. 접속).
오상훈. 「경기 침체가 우울증 몰고 온다… 서울 시민 절반이 ‘우울’」. 『헬스조선』. 2023.10.30. https://m.health.chosun.com/svc/news_view.html?contid=2023103002295 (2024.08.15. 접속).
윤희일. 「일본에서 의식적으로 눈물 흘리는 ‘루이카쓰(淚活)’ 인기」. 『경향신문』. 2017.01.02.https://www.khan.co.kr/world/japan/article/201701020950011 (2024.07.11. 접속).
이진송. 「‘가장 보통의 존재’들이 ‘함께’ 걷는 우울」. 『웹진 1. 《비유》』. 2020.09.29. https://www.sfac.or.kr/literature/epi/C0000/epiView.do?epiSeq=637 (2024.08.15. 접속).
이해영. 「“스트레스 풀려”…일본서 함께 모여 눈물 흘리는 ‘루이카쓰’ 확산」. 『연합뉴스』. 2018.01.19. https://www.yna.co.kr/view/AKR20180118157800009?input=1195m (2024.08.02. 접속).
조규홍. 「정신건강 정책 대전환, 국민이 행복한 나라로」. 『한겨레신문』. 2023.12.25.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121747.html (2024.07.16. 접속).
KTV 대한뉴스. (2024.07.12.). “정신건강 혁신, 5~10년 후 내다본 값진 투자” [영상]. KTV 국민방송. https://www.ktv.go.kr/issue/home/518547/view/705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