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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Jan 18. 2023

노동적 근면성

2005년 7월12일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입사했다. 지금은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지만 첫 부서는 SCM이었다. 당시에는 정규직 여사원이 없는 팀이 대다수였고 있어도 팀에 한 명이었다. 내가 배정받은 팀도 내가 첫 정규직 여사원이었다.

 신입사원 환영회 때 한 과장님이 말했다.

“너 그만둘꺼면 빨리 그만둬라. 괜히 너 교육하느라 시간 뺏기게 하지말고.”

 여자 정규직 신입사원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는 선배들은 하루 종일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입사 후 몇 일이 지나고 팀원들이 우르르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야, 씨발 사달이다, 사달.”

선배들의 대화 중 80% 이상이 저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뭐가 그렇게 사달이라는 거지. 누구도 나에게 뭐가 사달이라는 것인지 이야기해 줄 사람은 없었다. 궁금하면 따라가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선배들 틈에 끼어 따라갔다. 빈 회의실에 모여 앉아 대여섯명이 되는 사람들이 담배를 펴댔다. 회의실이 금새 연기로 가득 찼다. 수많은 이야기들도 오고 갔다. 왜 사달이 났는지, 그래서 어떻게 팀장한테 보고할껀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서로 의논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있었다. 주말에 데이트를 했는데 싸워서 골치아프다느니, 낚시 장비를 새로 장만해 이번주 주말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등등. 나는 이야기에 끼이지는 못했지만 모두 담배피러 나가고 없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멀뚱멀뚱 노트북만 쳐다보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 날부터 나는 팀원들의 담배타임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따라다니려고 눈과 귀를 쫑긋 세웠다. 언제 팀원들이 담배를 피우러 가는지 살피는 것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는 일이었다. 담배연기를 마셔대는 만큼 나의 존재감도 조금씩 커져가는 것 같았다. 조금씩 나도 대화에 끼이는 경우가 늘어났다.

처음 업무는 당시에 새로 도입된 SCM관련 시스템 업무였다. SCM의 주요업무는 생산법인과 판매법인의 상황들을 고려하고 조율하고 공급계획을 짜는 업무였는데 그런 업무가 시스템화되기 시작했던 때였다. 나의 공식적 사수로부터 시스템 업무를 한참 받고 있을 때였다. 북미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다른 선배사원이 불러 말했다.

“야 회의가자”

“네? 무슨 회의요?”

“북미 물동 이슈 회의.”

 내가 배정받은 업무가 아니긴 했지만 일단 선배사원이 가자고 하니 따라갔다. 무슨 이야기인지 절반 이상 알아들을 수도 없고, 왜 내가 여기 와있는지도 모를 회의를 마치고 선배사원이 말했다.

“회의한거 정리 잘 하고 잘 follow up 해봐.”

“네? 제가 배정받은 업무는 시스템이고, 북미 물동은 배정받은 업무가 아닌데요? 팀장님한테 저한테 북미 업무 가르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왜?”

“팀장님한테 말씀하시고 공식적으로 업무배정하시면 할께요.”

나는 비록 X세대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매우 MZ세대 같은 언행이었다. 선배사원의 머리끝으로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선배가 하라면 하는 거지 너 같이 개념없는 후배는 처음이다. 군대를 안갔다와서 그렇다. 다른 계약직 여사원과 다를게 뭐냐.

 나의 노동적 근면성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을까. 2023년인 지금으로부터 약 17년 전인 그때이후 나는 회사에서 “No”를 해본적이 없다. 불합리함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필요하다면 일단은 하고 나중에 불합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여러 업무가 연달아 배정되어도 미루지 않았다. 동료들이 퇴근한 후 혼자 사무실에 남거나, 동료들과 회식 후 집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업무를 펑크낸 적도 없다. 몇 일동안 서너시간만 자더라도 업무에 펑크를 내는 일이 잠을 못자고 피곤한 것보다 더 스트레스였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 시간과 경험의 축적으로 역량도 조금씩 발전했겠지만 나의 회사생활 18년의 팔할은 노동적 근면성이었다. 시간과 체력.

 아이들이 태어나고 엄마의 역할이 추가되면서 노동적 근면성은 더욱 빛을 발했다. 6시에 퇴근해 집에 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9시나 10시쯤 아이들이 잠이 들면 그때부터 새벽까지 낮에 못마친 업무를 마무리했다. 육아를 하는 임직원에게 출,퇴근을 한두시간씩 조정해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나는 그 제도 덕분에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9시에 출근했다. 우리 회사의 정식 출근시간은 8시이다. 남들보다 1시간 늦은 출근시간을 메꾸기위해 다음날까지 처리해도 되는 일을 하루 전에 처리했다. 아침에 출근하는 차 안에서는 운전하면서 핸드폰으로 미리 메일들을 체크했다. 한 시간 늦게 출근해서 사무실 도착하자마자 업무이야기를 하더라도 전혀 공백이 없었다.

 지난 1년동안 나는 입사이래로 최대의 업무 쓰나미를 경험했다. 코로나 기간동안 특수를 누렸던 사업이 위드코로나 시대로 돌입하면서 특수가 사라지고, 전쟁이나 인플레이션 등으로 사업이 어려워졌다. 거기다 팀에서 핵심 역할을 하던 몇몇 인원이 해외발령, 본사발령등으로 전배가면서 인원마저 줄었다. 두세 명이 나눠 하던 일을 혼자 도맡아했다. 경력은 17년인데 팀내에서 위치는 막내뻘이었다. 전체 10명중 65년생부터 78년생까지 선배들이 8명, 그 밑으로 나를 포함한 81년생 두 명. 배정받은 업무는 팀총괄. 팀총괄과 막내 역할이 동시에 주어진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총괄업무를 하려면 손발이 되어줄 담당자들이 필요한데 막내뻘이다 보니 스스로가 손발이 되어야했다. 그래도 나는 노동적 근면성이라는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오늘까지 안될 것 같은데 내일 오전까지 보내드려도 될까요?”

“지금 하고 있는데 한 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오늘까지 본사에서도 달라는 자료가 많아서요. 일단 본사자료부터 대응해야할 것같은 데 제가 오늘 중으로는 무조건 해서 내일 아침 출근하시면 보실수 있게 보내놓겠습니다.”

처음 한두달은 아직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느라, 또 다음 한두달은 새로운 이슈들이 많이 생겨서 생기는 단기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몇 달 잘 버티면 나의 노동적 근면성으로 지금까지처럼 잘해낼 수 있을꺼야. 하지만 일년이 지난 지금도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죄송합니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제는 10시만 되면 눈이 감긴다. 머리속도 멈춰 버린다. 멘탈이 체력을 이기던 30대가 훌쩍 지나고 체력이 멘탈을 지배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도 죄송합니다를 반복한다. 나의 노동적 근면성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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