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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Feb 03. 2024

불오짱

(불쌍 Or 짜증)

나는 일상적으로 자동차 연료등에 불이 켜지는 내가 불쌍하다. 심지어 연료가 바닥나서 자동차가 멈추는 상황을 세 번이나 겪어야 했던 내가 불쌍하다.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는 고작 10분의 여유를 갖지 않는 내가 짜증난다.

결혼 후 팀내 사내커플이라는 이유로 다른 팀으로 전배되었던 내가 불쌍하다. 진급 동기인 남편이 진급할 때 유산으로 인한 두 달의 휴가를 구실로 진급에 누락된 내가 불쌍하다. 전배에 대한 요구에 당당히 싫다고 말하지 못했던 내가 짜증난다. 둘 중 하나라도 진급이 되었으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주변의 위로에 웃어넘겼던 내가 짜증난다.

초기 유산이기는 했지만 두 번이나 유산을 겪어야 했던 내가 불쌍하다. 유산 수술 후에도 하루도 휴가를 쓰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야근까지 하며 씩씩한 척 했던 내가 짜증난다.

저녁 육아 당번인 날은 으레 저녁 끼니를 거르고 돌봄 이모님이 퇴근하시는 시간에 맞추어 귀가해 맥주로 배를 채우는 내가 불쌍하다. 아이들이 잠들고 난 후에도 남은 회사 업무를 하느라 침대에 눕지 못하는 내가 불쌍하다. 저녁 먹는 고작 30분을 아끼며 내 몸을 학대하는 내가 짜증난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때면 회사걱정에 마음이 불편하고, 회사에서 야근, 특근을 하거나 집에서까지 일을 해야할 때면 아이들 걱정에 마음이 불편한 내가 불쌍하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때면 회사 생각에 아이들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업무를 할 때면 아이들 생각에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내가 짜증난다.

회식으로 과음을 하고도 힘든 몸을 이끌고 아이들을 챙기고 출근도 해야 하는 내가 불쌍하다. 과음 후 힘들 것을 알면서 회식때면 항상 과음하는 내가 짜증난다. 과음때문에 사무실에서 헤롱헤롱 정신을 못 차리고 심지어 골방에서 몰래 잠을 자기도 하는 내가 짜증난다.

방이 두 개인 부모님집에 모일 때면 올케 불편하지 않게 막내 남동생 가족에게 방 한 칸, 형부 불편하지 않게 둘째 언니 가족에게 방 한 칸. 항상 거실에서 있어야 하는 나와 아이들이 불쌍하다. 겨우 하루 이틀 거실에서 지내는 것을 가지고 엄마 얼굴도 잘 쳐다보지 않고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엄마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내가 짜증난다.

월급이 입금되면 학원비, 관리비, 보험료, 베이비시터 월금이 이체되고 통장 잔고가 남지 않거나 모자라기 까지 하는 내가 불쌍하다. 매월 부족할 줄 알면서도 인스타그램에서 광고하는 물건에 현혹되어 일주일에 몇 번씩 구매하기를 눌러대는 내가 짜증난다. 몇 달에 한번씩은 꼭 백화점을 돌면서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을 사는 내가 짜증난다.

잠깐 숨돌릴 틈이 생기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찾아와 '놀아줘' '딸기 먹고 싶어'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같이 영화보자' '보드 게임하자' '씻을 때 옆에 좀 있어줘' 하는 아이들의 말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는 내가 불쌍하다. 잠깐 참고 들어주면 되는 것을, 어차피 다 할꺼면서 자주 욱해버리는 내가 짜증난다.

평일에는 육아, 회사때문에 잠자는 시간 말고는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고, 주말에는 평일에 못들어 준 아이들의 요구사항에 맞춰 이리저리 바쁜 내가 불쌍하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뭘 또 해볼까 고민하는 내가 짜증난다. 캠핑, 스키장, 골프 등 아무 일정없이 주말을 쉬지 못하는 내가 짜증난다.

밀린 업무가 하나 정리되기도 전에 또 다른 업무가 쌓이고 그 속에서 마음 불안한 내가 불쌍하다. 같은 조직에 오래 있어 업무가 익숙하다는 이유로 남들 두 배의 일을 하고 있는 내가 불쌍하다. 팀장이 바뀌니, 팀원 중 누군가 주재원 발령이 나서 생기는 업무 공백을 채워야 하니 다른 조직으로 이동도 하지 못하는 내가 불쌍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답답해도 앞에서는 정작 안 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내가 짜증난다. 그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짜증을 내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이 짜증난다.

나는 내가 불쌍하다. 그리고 짜증난다. 나를 볼쌍하게 만드는 내가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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