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꼭지에서 천연 빙하수와 온천수가 콸콸 나오는 나라, 아이슬란드
물가가 비싼 아이슬란드에서 유일하게 경비를 지출하지 않은 항목이 있었으니, 바로 생수 구입비이다. 아이슬란드 수돗물의 95%는 어떤 화학물도 첨가되지 않은 천연 지하수인데, 수십 년간 용암과 암반을 통해 자연 필터링된 물이라서 별도의 염소 처리나 정수과정이 필요 없단다. 세계 최고 수준의 깨끗하고 맛 좋은 수돗물이라며 아이슬란더들의 자부심도 높았는데, 내가 머물던 호스텔에서는 플라스틱 병에 든 생수 대신 수돗물 음용을 적극 권장하는 안내마저 할 정도였다. 슈퍼마켓에서 구입하는 생수도 결국 같은 물이라고 하니, 그저 심리적 거부감을 극복하고 텀블러만 챙긴다면 무료로 얼마든지 물을 마실 수 있는 셈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아이슬란드는 ‘불과 얼음의 땅’이다. 국토를 뒤덮은 빙하만큼이나 땅 밑의 화산도 거대하다.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 판의 접경지대라는 지질학적 특성 때문에 지진 활동과 화산 폭발이 잦은 곳이지만, 대신 풍부한 온천과 지열 에너지를 누릴 수 있다. 근교 나들이를 떠날 때면 허허벌판이나 민둥산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을 종종 목격했는데, 따뜻한 온천수가 시냇물로 흐르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더들이 지열에너지를 활용해 온 역사는 꽤 길다. 초기 정착민 시대부터 빵을 굽거나 고기를 익힐 때 온천수 지점의 땅을 파 냄비를 묻어두는 방식으로 요리를 했고, 온천수를 활용해 공중 목욕 문화도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1900년대에 들어서 부터는 파이프를 활용해 지열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외부 의존적인 화석에너지를 벗어나 자급가능한 지열에너지를 주 에너지원으로 삼게 되었다. 현재는 총전력의 30%, 총난방의 85%가 지열에너지를 통해 공급되며, 그 밖에도 비닐하우스와 온실 농업, 겨울철 도로 결빙 방지를 위한 보온 설비, 스파와 온수 수영장 등 다방면에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지하 온천수가 수돗물의 수원이다 보니, 온수가 기본값(Default)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 온수가 너무 뜨거워 수도국에서는 적당히 식혀 각 가정에 공급해야 할 정도다. 때문에 라디에이터 난방이나 온수 사용료가 매우 저렴해서 아이슬란더들은 유독 긴 샤워 시간을 즐기고, 겨울철 실내 온도가 높으면 난방 온도를 낮추는 대신 창문을 열어 환기한다고 하니... 겨울철 난방료 절감을 위해 전기장판과 내복 구비가 필수인 나라 사람으로서 부럽기도 했다.
지열 발전소가 뜻밖의 관광 명소를 탄생시키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페를란(Perlan)과 블루라군(Blue lagoon)을 들 수 있다.
레이캬비크 외스큐흘리드(Öskjuhlíð)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페를란(Perlan)은 ‘진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섯 개의 원통형 건물 위에 둥근 유리 돔이 덮여 있다. 지열 발전소의 온수 저장탱크로 사용되어 온 공간을 1991년 리모델링 완료 후 전시관, 박물관, 레스토랑, 기념품샵 등 대중 문화시설로 탈바꿈했다. 특히 아이슬란드 국민화가였던 Jóhannes Kjarval가 생전 자신의 드림랜드를 짓고 싶어 했던 언덕 위에, 사후 시민들이 그의 소망을 담은 건축물을 세웠다는 설명을 듣고 나면 유리 벽과 돔 천장, 조명 디자인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유리 돔 바로 밑에 위치한 카페와 레스토랑은 360도로 천천히 회전하는데, 오래 머물수록 다양한 방면의 시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만약 시간 여유가 없다면 꼭대기의 전망대만 둘러봐도 괜찮다. 페를란은 레이캬비크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기 때문에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여느 나라 대도시에서와 같은 화려하고 눈부신 전망은 없지만, 오히려 한껏 겸손한 스카이라인이 주는 평온함, 탁 트인 파노라마 풍경 속 여백 많은 담백한 시야가 나름 사랑스럽다.
블루라군은 레이캬비크에서 차로 2-30분 거리에 있는 온천으로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이다. 입욕을 즐기기 가장 적당하다는 40도의 평균온도, 뽀얀 우윳빛에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신비로운 온천수, 검은 용암석으로 둘러쳐진 벽, 실리카와 미네랄이 풍부해서 피부에 좋다는 하얀 머드까지 관광객을 홀리는 매력이 다분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이곳은 인공 온천인데, 1976년 스바르트셍기(Svartsengi) 지열발전소에서 온수와 증기를 사용하기 위해 추출한 지하수가 흘러나와 담기던 부대시설이었다. 그 물이 인체에 무해한지 알 수 없던 시절, 건선 치료를 위해 무슨 시도든 해보고 싶었던 한 피부병 환자가 특별 허가를 받고 이용한 후 효과를 봤고, 이후 피부질환자를 위한 입욕 시설로, 다시 대중을 위한 스파로 점차 발전되었다.
빙하와 폭포, 온천수로 수자원이 풍족한 나라 아이슬란드. 깨끗한 수돗물, 넉넉한 온수, 윤택한 지열 난방을 누릴 수 있는 곳. 하지만 물 사용과 관련해 관광객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문제가 있으니, 바로 수돗물에서 나는 달걀 삶은 냄새이다. 나도 처음 숙소에 도착해 온수를 틀었을 때 구리구리한 방귀 냄새에 흠칫 놀랐는데, 온천수에 함유된 유황 성분 때문이란다. 그래도 너무 염려할 건 없다. 후각은 이내 적응하게 마련이고, 오히려 씻을 때마다 온천에 놀러 온 기분이 들어 의외로 만족스러울지도 모르니까.
다행히 냉수는 빙하수라서 냄새가 없다. 아이슬란드에 간다면 플라스틱 사용도 줄이고 경비도 절감할 수 있도록 수돗물 마시기에 적극 동참해보는건 어떨까. Drink responsib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