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 요코가 매번 아이슬란드에 오는 까닭은?
“존 레논의 노래 <Imagine>이랑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가 어딘지 알아? 바로 아이슬란드야”
어느 날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안나가 말했다. 그녀는 자원봉사자 숙소에 함께 묵고 있는 러시아 대학생으로 ‘포토 마라톤’ 프로그램의 팀 리더였다. 아이슬란드의 매력에 푹 빠져 벌써 세 번째 워크캠프에 참가 중인 그녀는 자신이 아는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좋은 곳엔 꼭 함께 데려가고 싶어 하는 살뜰하고 다정한 동료였다.
<Imagine>이라...
존 레논의 곡 중 가장 널리 사랑받는 노래. 전쟁 없는 세상, 국가나 종교라는 이름의 억압이 없는 세상, 가난과 차별이 없는 세상, 모두가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던 그 노래. 그 꿈같은 소망이 아이슬란드와 닮았다고? 식탁 위에 둘러앉아 있던 우리는 각자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과연 그랬다. 우선 아이슬란드에는 군대가 없다. 육군, 해군, 공군이 모두 없다. 대신 치안을 위한 해안경비대와 경찰이 있는데, 이 해안경비대원 중 일부는 평화유지활동(PKO) 요원으로 세계 분쟁지역에 파견되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경찰’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이슬란드 경찰은 총기를 소지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경찰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된 이들의 활동사진을 보면 길 잃은 어린이 보호, 해안 순찰 중 커피 한잔, 새로 들어온 경찰견 소개, 어린이 체험활동 참여 지원, 동료와 순찰차 안에서 셀카, 호숫가 백조 구경 등 긴박함과는 꽤나 거리가 멀다. 물론 낮은 범죄율 덕분에 가능한 일상일 테다.
(* 궁금하다면 경찰청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시라! https://www.instagram.com/logreglan/?hl=en )
아이슬란드에서는 성차별이나 성소수자 혐오가 어색하고 낯설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하는 성평등 지수는 12년 연속 세계 1위를 유지 중이며, OECD 국가 중 동성애 관용도도 가장 높은 곳이다(2019년 기준). 세계 최초로 레즈비언 총리가 나왔고, 2010년부터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었으며, Planet Romeo의 조사에서 게이들이 가장 행복한 나라로 뽑히기도 했다. 매년 8월 레이캬비크에서 열리는 ‘게이 프라이드’ 행사는 시내 중심가 도로를 아예 무지개 색으로 칠하고 퍼레이드와 파티로 들썩거리는 분위기라 관광객들에게 놓치지 말아야 할 축제로 소개되곤 한다.
또한 아이슬란드는 세계 108개 국가 중 기대수명 불평등이 가장 낮은 나라이다. 이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건강권 격차가 적은, 즉 사회보장 제도가 비교적 든든한 사회라는 뜻이다. 국제무대에서는 신생 독립국들의 지위를 맨 먼저 인정해 주는 용기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구소련의 발틱 국가들과 코카서스 국가들의 독립을 세계 최초로 인정했고, 2011년에는 서구 국가들 중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지지한 바 있다. 리투아니아는 '모두가 침묵할 때 두려움 없이 독립을 인정해준' 아이슬란드를 기억하기 위해 도로명을 지정하기도 했다.
이런 점들 덕분일까. 실제로 아이슬란드는 2008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세계평화지수(GPI) 1위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어떤가. 이쯤이면 <Imagine> 노래와 썩 어울리는가? 그러니 아이슬란드에 존 레논을 기리는 특별한 조형물이 세워진 건 꽤나 필연적이다. 바로 레이캬비크에서 페리로 7분 거리에 있는 비데이 섬(Viðey Island)의 “Imagine Peace Tower”가 그것이다. 존 레논의 아내였던 오노 요코가 그를 기리기 위해 2007년 설치한 작품으로, 그의 생일인 10/9부터 기일인 12/8까지 약 두 달간 평화의 빛을 하늘로 쏘아 올린다.
‘빛의 우물’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타워에는 ‘Imagine Peace’라는 문장이 24개국의 언어로 각인되어 있다. "평화를 꿈꾸자" 낯선 문자들 속에서 눈에 익숙한 한글을 발견하게 되면 괜히 반갑고 뿌듯해진다. 이매진 피스 타워는 평소엔 하얗고 밋밋한 원통처럼 보이지만, 점등 기간엔 밤하늘로 쏘아 올려진 푸른 광선이 꽤나 강렬하고 몽환적이다. 마치 우주까지 닿을 듯 곧게 뻗은 광선 기둥은 오랜 인류의 숙원, 평화를 향한 지구인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평화의 빛 점등식 때는 오노 요코가 참석하기도 하는데, 그녀가 오는 날이면 비데이 섬으로 향하는 페리를 통째로 빌려 누구나 무료로 입도하게 해준다고 했다. 40여년 전 존 레논과 함께한 <World Peace 캠페인> 당시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완성해 낸 그녀는, 직접 Imagine Peace Tower 홈페이지를 운영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설치장소가 왜 아이슬란드냐는 질문에 "이 작품에 필요한 전력이 물(지열 온수)로 만들어진다. 석유처럼 전쟁도 오염도 일으키지 않는다"던 그녀의 탁월한 대답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꼭 이매진 피스 타워가 아니더라도 비데이 섬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지금은 아담한 목조 교회 한 채와 카페로 쓰이는 석조 건물 한채만 남은 한적한 무인도지만, 과거엔 아이슬란드에서 으뜸가는 수도원이 있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고, 한때는 레이캬비크에 우유를 공급하던 거대한 목장이, 또 어느 시절엔 어업 산업기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수도인 레이캬비크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기에 주말마다 하이킹이나 바이킹을 위해 찾는 이들도 많다. 호젓한 섬을 발길 닿는 대로 거닐면서, 미국 조각가 Richard Serra의 작품 <Milestone>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섬 곳곳 랜드마크에 숨어 있는 이 돌기둥 9쌍은 마치 고대 성소의 비밀스러운 표식 같기도 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둔 큰 액자 같기도 하다.
Imagine Peace.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의 가장 평화로운 섬. 아무것도 없기에 부족함도 없는 곳.
쾌청한 어느 여름 날, 한적한 그 섬을 자전거로 한바퀴 돌아보는 것은 어떤가.
새 울음소리와 파도 소리만 가득한 검은 모래 해변에서 어쩌면 당신에게도 기적처럼 완벽한 고요의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