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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Dec 27. 2021

10. 걱정마, 네 자전거는 너 없이 아무데도 가지않아

아이슬란드 서점 앞에서 '신뢰의 사회적 비용'을 생각하다.

워크캠프 기간 동안 함께 숙소에 묵던 동료들은 서로 참가 중인 자원활동 프로그램이 달라도 한 팀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로그램 일과가 끝나면 삼삼오오 동네 온천에 가서 피로를 풀고, 매일 저녁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휴일엔 도시락을 싸서 시내 구경이나 근교 나들이를 나섰다.      


각자가 살아온 환경, 떠나온 나라가 다르다 보니 아이슬란드에 오게 된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홍콩과 멕시코에서 온 대학생들은 빙하와 눈에 대한 낭만을 얘기했고, 프랑스에서 온 NGO 활동가는 하이킹과 캠핑을, 포르투갈에서 온 채식주의자는 자연보호 활동을, 미국에서 온 연극 배우는 이색적인 액티비티와 클럽 탐방을 기대했다. 회사생활에 찌든 휴직자였던 나는 그저 멀고 낯선 어딘가에 다다르고 싶었다.     


러시아에서 온 캠프 리더 Anna는 아이슬란드 재입국 비자가 거절당하자, 모스크바의 프랑스 대사관에 찾아가 사정해서 비자를 발급받은 후 솅겐조약*을 통해 입국할 정도로 집념을 보였는데, 마치 아이슬란드라는 이름의 신흥종교에 푹 빠진 열렬한 신도 같았다. 그녀의 아이슬란드 예찬은 꽤나 버전이 다양해서 아무리 들어도 지겨울 틈이 없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좋냐”는 질문에 그녀는 설명 대신 짧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그녀가 처음 아이슬란드를 방문했을 때였다. 왠지 지낼수록 호기심이 생기는 이 나라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하루는 시내 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 머물던 식물원에서부터 서점까지는 도보로 45분이 넘는 거리였기에 지인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나선 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서점 앞에 도착해 자전거에서 내렸는데, 자물쇠가 없었다. 잠시 고민 끝에 그냥 세워두고 서점에 들어갔으나, 아무래도 책에 집중하긴 어려웠다. 빌려온 자전거를 행여 잃어버릴까 봐 걱정되니 자꾸만 창밖을 뒤돌아봤다.

그러자 점원이 다가와 혹시 도와줄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밖에 세워두고 온 자전거가 걱정돼서 그렇다고. 점원은 그 말을 듣자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 네 자전거는 너 없인 아무 데도 못가(Don’t worry! Your bike never goes alone)”      


해맑게 웃는 점원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전거를 도둑맞을 수 있다’는 상상조차 안 해본 평허한 얼굴. 그는 그녀의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가 살던 나라에서는 열쇠로 잠가 둔 자전거조차 종종 훔쳐가곤 했는데, 이 나라는 대체 뭐지?      


하긴, 나도 의아할 때가 있었다. 국립 박물관에 갔을 때 벽면 한쪽에 나란히 걸린 외투들을 봤을 때, Cultural House 화장실에서 세면대 옆에 높이 쌓아둔 휴지 두루마리들을 봤을 때, 유모차를 창밖에 세워두고 카페나 상점에 들어가는 부모들을 봤을 때... 괜히 보는 내가 더 불안했다. 공산품 물가가 드높은 이곳에서 저 비싼 외투들을 그냥 벽에 걸어두다니, 누가 슬쩍하면 어떡하려고 교체용 물품들을 버젓이 밖에 쌓아 둔 거야, 잠자는 애를 누가 업어 가면 어쩌려고 저렇게 두고가?


유모차에서 잠든 아기를 야외에 놔두는 장면은 비단 아이슬란드 뿐 아니라 노르딕 다른 국가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사진출처: https://grapevine.is)


인기 식당에서의 “신발분실 책임못짐”이란 경고문이 속담처럼 익숙하고, 비싼 우산을 들고 온 날엔 상점 우산꽂이에 꽂아두기가 찝찝하고, 어린이들에게 “길에서 낯선 할머니가 짐을 들어주거나 길을 찾아달라고 해도 직접 도와주지 말라”라고 가르쳐야 하는 나라에서 온 나는, 이곳의 무방비하고 태평한 모습들이 당혹스럽고도 부러웠다.     


유괴 및 실종 위험 때문에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경계를 훈련받아야 한다.(사진출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영유아 실종예방교육 애니메이션)


그래, 이런 걱정들만 삶 속에서 사라져도 우리네 일상은 얼마나 더 자연스럽고 여유로울까. 책이나 TV에서 말하던 “신뢰의 사회적 비용”이라는 게 이런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불안하기 때문에 ‘보안’에 더 집착하고, 불신하기 때문에 ‘투명성’과 ‘신뢰’를 더 강조한다. 기존의 자물쇠가 못 미더워 걸쇠를 하나씩 더 달고, 아예 번호식 전자키로 바꿨다가, 또다시 값비싼 생체인식 잠금장치로 교체하는 식이다. 하지만 CCTV가 더욱 촘촘해지고, 시스템적 감시가 고도화되고, 공개되는 정보량이 많아진다고 해서 우리가 이웃과 사회를 그만큼 더 신뢰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이슬란드의 높은 사회적 신뢰도는 어떻게 가능했던걸까. 아이슬란드 서점 앞에 주차된 자전거가 오늘도 이방인에게 꼬리 긴 질문을 남긴다.     


서점 앞에 주차된 자전거는 익숙한 풍경. 1872년에 개점해 여전히 성업 중인 체인 서점 Eymundsson에도 꼭 한번 들러보자.(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그나저나, 아이들란드인들이 어둡고 긴 겨울을 견디기 위해 많이 찾는 곳이 ‘태양의 나라’ 스페인이라던데, 관광객 대상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그곳에서 다들 무사한 걸까. 혹시 스페인 집시들에게 겨울철 대목 손님으로 환영받는 건 아닐까... 요놈의 쓸데없는 상상력이 또 선을 넘어 막 내달린다. 아이고, 오늘도 일찍 잠들긴 글렀구나.



* 솅겐조약 : 유럽 국가 간 자유로운 통행을 위해 체결된 국경 개방 조약. 솅겐조약 가입국은 같은 출입국 관리정책을 사용하기 때문에 국가 간 제약 없이 무비자로 이동할 수 있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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