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안 Oct 05. 2021

불행을 마주하는 순간




어김없이 일기예보와 다른 맑은 날씨였다. 날씨 덕에 가벼워진 발걸음에 오 분이나 단축한 십 오분 만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에 먼저 앉아있던 사람들은 나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마스크를 올려 썼다. 그 모습을 보며 주머니에서 얼른 마스크를 집어 들어 착용했다. 맑은 공기가 무색하게 여전히 코와 입을 가려야 하는 실태가 아쉽다. 버스를 갈아타는 길에 우연히 벚꽃이 활짝 핀 모습을 마주했다. 길 위의 모든 사람을 반기듯 분홍 빛을 머금은 벚꽃나무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9월 30일의 기억을 화사하게 비춘다. ‘우연’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에 놀라움을 나타날 때 쓰인다. ‘필연’에는 없는 ‘설렘’을 동반하여 예기치 못한 순간을 풍요롭게 만든다.      




날씨의 기운을 따라 도착한 곳은 바다였다. 수평선 위로 작은 배 여러 척과 구름이 뭉실뭉실 떠있다. 책 속의 회색 글자를 읽는 대신 다채로운 색깔의 바다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다. 하늘을 올려다볼 필요도 없는 파란 바다를 응시하고 있으면 내면에 절로 감응하게 된다. 새벽 감수성도 취중진담도 아니다. 씨실과 날실처럼 뒤엉켜 존재하던 유약한 생각이 서로 교차해 조화를 이뤄낸다.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 말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던 성향이 서서히 바뀌어간다. 어떤 이야기든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던 과거의 순수함과 용기 혹은 경솔함은 이제 인내하는 힘으로 변해간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얽히고설킨 마음을 멍하니 앉아서 털어낼 수 있는 나이인가 보다.




구름이 몰려오자 새파랗던 바다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쾌청한 날씨와 어우러지던 모습이 회색의 아스팔트 바닥과 비슷하게 보인다. 구름으로 뒤 덮인 바다 표면은 꼭 인생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자의와 관계없이 불행은 구름처럼 순식간에 닥쳐온다. 불행에 닥친 모습은 흡사 쏟아지는 장대비에 모두가 우산을 쓰고 다니는 와중에 혼자서만 우산 없이 쫄딱 맞는 초라함과 같다. 거센 비를 맨 몸으로 혼자 맞노라면, 몸에 걸친 비싼 옷도 공들인 머리도 손에 들린 유명한 케이크도 전부 쓸모 없어진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상점들은 눈앞이 비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나만 빼놓고 잘 굴러가는 모습에 서러움도 잠시, 결국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나 자신을 원망한다. 언제쯤 이 불행의 비가 걷힐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다. 독한 항생제를 6개월이나 복용한 결과는 완치의 기쁨이 아닌 약물 부작용의 시작이었다. 호르몬 체제를 교란시켜 피부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그 당시 ‘악화’라는 단순한 말로 표현하기엔 스스로를 괴물로 받아들이며 외부로부터 고립시켰다. 외모의 부정적인 변화는 갓 대학을 입학한 스무 살이 감내하기 어려운 불행이었다. 피부를 칼로 도려내고 싶은 마음을 눌러내고 원상 복귀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밀가루와 육류를 끊어내고 규칙적인 운동은 물론이며 피부과와 한의원을 쉴 새 없이 방문했다. 내 생에 가장 필사적인 일 년이었다. 간절한 마음과 다르게 금방 아지지 않았다. 시간에 지쳐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예전과는 다르게 생긴 얼굴이지만 내면의 나를 찾아 겸허히 받아들였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다. 회복되기까지 삼 년이 넘게 걸렸고 아직까지 민감한 피부를 달고 산다. 하지만 같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되더라도 불행에 굴복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삶의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불행을 마주할 때 할 수 있는 일은 불행이 걷히기를 나 자신과 함께 기다리는 것이다.



비록 구름에 뒤덮인 바다의 겉모습은 그림자로 얼룩덜룩해지더라도 그 안은 여전히 바다 자체로 투명하다. 비에 흠뻑 젖어도 변하는 건 망가진 머리와 옷, 신발 그리고 가방뿐, 나 자신이 아니다. 생각처럼 흐르지 않는 삶에, 불분명한 불안함에 방황할 찰나에도 우리 내면 역시 자기 자신 자체로 여전히 존재한다. 예고에 없던 불행이 찾아와도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자신을 향한 흔들림 없는 믿음은 곧 맨 몸으로 비를 맞는 시간이 짧아지도록 도울 것이다.


삶의 아름다운 순간은 벚꽃이 피고 지는 때와 같이 짧기만 해서 얄궂다. 하지만 해가 뜨면 그늘진 바다 표면이 다시 빛나는 것처럼 다행히 세상은 영원히 어둡지만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라클 조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