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안 Feb 17. 2022

김치찌개는 못해도 괜찮아



<당신의 정체성은 이미 설정되었습니다.>라고 머릿속에 심어놓기라도 했는지 과거의 나는 취향이나 성향 및 가치관에 대해 작은 일부도 변하기를 거부했다. 낯선 환경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모습은 누구나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내게는 굉장히 어색한 상황에 놓인 것만 같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지나친 신념에서 비롯된 결과는 다양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한 가지를 뽑으라면 바로 <요리하지 않기>였다.


집에서 요리는 온전히 엄마 아빠가 담당하며 나는 부엌과의 거리가 한참이나 멀었다. 부모님께서 자식은 셋이나 두셨으나 어느 한 명이라도 요리하는데 돕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지금 안 하다가 결혼하고 특히 시댁 가서 요리하고 설거지하면 후회할 테니 지금부터 차라리 해봐" 흔히 지혜로운 며느리 노릇 따위를 강요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었지만, 혹시나 일어날 법한 일에 대해 엄마는 내게 먼저 일러주고 싶어 하셨다.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도 엄마 아빠가 해주는 밥만 먹던 사람이 그 한마디에 퍼뜩 정신 차려서 요리를 시작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아마도 이런 대답을 했었다. "결혼해서도 시댁 가서도 안 할 건데?"


결혼을 한 현재, 요리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다행히 시댁에 가서 하지는 않는다. 요리의 '이응'자도 몰랐으나 밑반찬은 물론이며 찌개를 끓이고 김밥을 말아보기도 했다. 초보운전자에게 가장 어려운 게 주차라면, 초보 요리 단계에서 가장 어려운 건 ‘태우지 않는 법’이었다. 김치찌개에 넣을 돼지고기를 볶다가 다 태워버려 거무튀튀한 색을 완성해내기도 하고 감자볶음이나 어묵볶음 등 볶음류는 죄다 태우기 일쑤였다. 지금은 원래 요리 담당인 남편보다 더 맛있게 하는 반찬이나 찌개의 가짓수가 생겨났다. 요리를 잘하는 수준은 못되어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대접하고 싶은 마음 하나면 요리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굳게 믿었던 내 본질이 변해가는 모습을 볼 때 처음엔 그것을 부정했다. 주로 상황을 탓하며 내 의지와 무관하다는 태도를 지녔다.  손대지 않았던 영역에 침범하는 일이 고작 요리에 불과했을 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여전히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일 줄은 몰라도 다른 사람이 해준 음식을 더 맛있게 먹는 법을 배웠다. 남들 다 하는 요리를 시작으로 내가 부정했던 영역에 하나둘씩 손을 대보려 한다. 기존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려는 마음은 자칫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거창한 내가 되려는 게 아니라 새로운 내가 되려 한다는 것을!






문제의 거무튀튀한 김치찌개
마찬가지로 다 태워버린 감자볶음과 어묵볶음
처음 말아본 김밥
한층 나아진 현재 김밥
매거진의 이전글 불행을 마주하는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