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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라이트릴 Dec 13. 2022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1

나의 하이라이트릴

검은색 치마와 하얀색 반팔 블라우스에  똑같은 올림머리를 하고 대기하고 있는 여성들. 2002년 1월 항공사 승무직에 면접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중에 내가 선발 될 수 있을까.’


 걱정과 두려움으로 그동안 내가 적어놓았던 예상 질문 답안 공책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웅얼웅얼할 뿐이었다.



 다들 절실해 보였다. 원래 예정된 면접 일정은 2001년 10월쯤 이었다. 전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미국 911 항공기 납치 테러로 항공사들은 얼어붙었고, 취업 준비생들은 채용이 재개될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준비생 카페에 올라오는 정보와 후기들은 마구 넘쳐났다. 먼저 전형을 치룬 사람들의 실시간 후기들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글에 매달리고 싶은 심정으로   종일 마우스를 움직여댔다.


면접관들 인상은 어떻고, 질문은 어떤 것을 했으며, 우리 조는 다 붙은것 같다. 우리 조는 다 떨어진 것 같다.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에게 집중해보기로 했다. 성실한(?) 나의 대학 생활의 결실. 클래식 기타.  ‘이 아이를 데리고 가야겠다.’



  98년. 대학교 2학년때, 클래식기타 동아리의 문을 두드렸다. 어린 시절 어려운 형편 때문에 피아노를 배우다 말았던 한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화성 악기라도  배워보자는 심정으로 가게 된 곳이 클래식 기타 동아리였다. 회원 모집하는 선배들에게 지원서를 내고 나니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4학년이라 졸업해야 하는 여자 선배들과 군대가는 2학년 동급생, 군대에서 잠깐 휴가 나온 3학년 선배들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입 회원을 뽑겠다면서 기타를 가르쳐 줄 사람도 운영할 사람도 없는 유령 동아리였던 것이다.


 곧 입대해야 하는 회장은 나에게 동아리를 인수인계했다. 얼떨결에 아무것고 모르는 내가 회장이되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우리 동아리의 시조, 80번대 학번 대 선배가 우리 학교 행정실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와 함께 동아리를 이끌기로 한 다른 친구랑 일주일에 두 번 선배한테 레슨을 받으러 갔다. 30대 중반 남자 선배는 손이 엄청 크고 두꺼웠다. 선배의 기타는 스페인제 기타였는데 두꺼운 손과 만나 깊이 울렸다.

 선배는 카르카시 교본이 기본이라고 했다. 손에 계란이 담겼다는 상상을 하며 기타줄과 친해져야 한다고 했다.

 카르카시 연습곡을 하나 하나 내것으로 만들수록 탐나는 곡이 있었다. 바로 ‘알함브라궁전의 추억’.


그 곡을 내 곡으로 만들기  위해 아무도 오지 않는 동아리방을 지켰다. 나는 회장이니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더욱이 ‘알함브라’를 나의 연인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혼자 체르니 30번 피아노 교본을 연습하는 것처럼 재미 없고 외로운 자신만의 싸움에서 다른 사람들은 계속 기권했다. 동아리방은 더욱 썰렁해졌지만, 나는 매일 동아리방에서 5시간 6시간 연습에  몰두했다.  


 등하교하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손가락으로 트레몰로 연습을 했다. 엄지,  집게, 중지, 약지 손가락이 차례로 한음을 쳐서 떨리는 소리를 내야  하는데 음 간격이 균일하고 음의 크기도 균일해야 한다. 안그러면 말타는 것처럼 다그닥 다그닥 촌스러운 소리가 나게 되는 것이다.


 밥 먹을때도 티비 볼 때도 손가락은 종일 트레몰로 연습을  했다.


 드디어 시조 선배님께 가는 날. 선배님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보여 드렸다. 선배님은 “이야, 너 정말 많이 늘었구나.  말타는 소리도 안나고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잘 치네. 이제 여기 안와도 되겠다. 야.” 선배님의 칭찬으로 회장 다운 회장이 된 것  같았다. 후배들을 더 뽑아서 내가 직접 가르쳤다. 워낙 힘든  악기라 50명이  지원해도 몇명 안 남았지만 그 후배들에게 집중하며 정기 연주회도 열고, 엠티도 가고, 동아리를 정상화했다. 내가 졸업하고 나서도  동아리는 계속  됐다.



 최종 면접 대기실.


“1004번 들어오세요.”


 나의 성실함의 증표, 내 열정의 이력서인 클래식 기타를 들고 움직였다. 면접관님들께서 내 기타를 궁금해 하시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려드릴 계획이었다.


 “그건 뭔가요? 기타 인가요? 두고 들어오세요.”


 아쉽게도 두고 들어가야 한단다.


 괜찮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에게 충분히 용기를  주었다. 기타를 가볍게 내려놓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표정을 밝게 하며  들어갔다.


 “아로마씨는 비행기에서 기타 치실 건가요?”


 “네, 매직팀에 들어가서 기타치며 손님들께 즐거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면접관이었던 상무님이 내가 기타를 들고 온 것을 보셨던 것이다.



 며칠  후 날아온  메일.


 ‘아로마씨의  합격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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