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도
온천 원숭이 여행기
말 그대로 짐처럼 느껴지는 무거운 짐을 터덜터덜 끌고 냉정한 비바람을 맞으며 프론트로 들어왔다. 스미마센. 여행지에서 맞는 찬바람은 어째선가 더 서럽다. 불씨가 다 꺼지고 모락모락 훈김만 남겨진 매캐한 화로 앞에 앉아서 체크인을 기다리고 있다. 따끈한 청주 한잔 생각이 절로 난다. 싶은 순간에 정말로 웰컴 드링크로 달달한 참마 사케를 내어준다. 무척 달고 무척 찐득하다. 저는 지금 유후인에 와 있습니다. 무슨 현지 특파원 같은 건 아니지만.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나오는 아주 간단한 정보지만, 유후인은 오이타현 중앙에 위치한 온천 마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온천을 하러 후쿠오카에서 굳이 몇 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기왕 온천에 왔으니 다다미 방도 빌리고, 노천 온천도 큼지막한 곳으로 고르고, 가이세키도 정식으로 먹으러 왔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의 유후인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일본 온천을 이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소소한 가이드 라인이다. 고작 뜨거운 물 가지고 되게 호들갑이네 하는 사람들도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대충 짐을 부려놓고 부랴부랴 안내받은 노천 온천으로 출발한다. 겨울이니까 당연히 무지하게 춥다. 온천 마을이라고 공기까지 후텁지근 해지는 것은 아니다. 참 신기하죠. 바람도 거세고 눈만 깜빡여도 몸에서 김이 나온다. 그래도 입은 것은 단출한 유카타 한벌. 쪼리같은 게다를 신고 타닥타닥 존재를 선포하듯 나무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연다. 그리고 그곳에는 우리가 상상하던 일본표 노천 온천이 기다린다. 부글부글 맛있게 끓는 커다란 나베처럼.
간단한 애벌 샤워를 마치면 곧바로 뜨끈한 탕에 몸 전체가 푸욱하고 들어간다. 몸이 익을듯 무척 뜨겁다. 그렇지만 지금은 겨울이니까 추운 것처럼, 온천이니까 뜨겁다. 불평 금지. 수건을 몸에 걸치고 스륵스륵 나아가 매끈한 석조벽에 머리를 댄다. 이마에 수건을 올려두고 청명한 하늘을 보고 있으면 ’아아, 온천이구나. 재밌다'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온천에서는 그런 명석한 사고 기술이 별다른 노력 없이 물리적으로 가능해진다. 풍경을 보는게 지루해질 때면 챙겨온 문고본을 꺼내서 퀄퀄 쏟아 내려오는 물줄기 옆에 자리를 잡는다. 미끌미끌한 벽에 기대어 손을 닦아가며 내키는만큼 독서를 한다. 온천에 온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시간의 계획적인 운용은 고려사항이 아닌 것이다.
규산과 유황이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찌르고, 별안간 돌풍이 갈대를 사사삭 뒤흔들고 온천탕 표면의 물안개를 몰아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그쯤이면 차갑던 머리도 흐리멍덩해지고 몸이 슬슬 갓 지은 떡처럼 흐물렁해진다. 더이상 책을 읽을 기제가 아니다. 도무지 무언가에 집중할 수 없다. 몸은 물과 닿아있는 표면이 아니라 그 내부의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열원을 품고 밖으로 가득 채워나간다. 혈액의 순환도 물의 흐름처럼 느릿느릿해진다. 그리고 내외부의 온도를 맞추듯 표리일체의 독특한 균형감을 맛본다. 머리가 마치 제동 걸린 자전거처럼 삐걱거려서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라는 게 불가능하다. 슬슬 풍경도 아득해지기 시작한다.
모락모락 피어오는 안개 속에서 원숭이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은 그때쯤이다. 언제부터인지 희끗한 털의 온천 원숭이는 탕의 반대편에서 붉은 머리와 꼬리만 내놓고 눈만 끔벅거리고 있다.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피부색이 그런 것이다. 저 자식이 저기에다 볼일을 보면 안될텐데. 흐음. 원숭이 주제에 건방지게 인간과 겸탕이나 하고 말이야. 가까이 다가가 조그만 머리통 뒤에 있는 이라도 잡아주면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찬찬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안개 속에서 묵직한 미닫이 나무문이 드르륵 열린다. 캔버스 커튼을 들어 올리고 쪽진 머리의 2022년도 미스 재팬이 고운 유카타를 입고 종종 걸음으로 들어온다. 은속 쟁반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아사히 병맥주와 유리잔을 들고 들어와 뒤로 문을 닫는다. 드르륵 탁. 어이 거기에 두고 이리 와서 등 좀 밀어줘. 하는 멍청한 상상을 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풀어져 버린다. 쩝.
어릴 때 들었던 자극적인 구전 설화와는 다르게 일본 노천탕에는 남녀 구획이 명확하게 되어있다. 서로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두 노천탕 중에서 더 작은 쪽. 더 큰 쪽은 여탕이다. 매일 아침 6시를 기점으로 남탕과 여탕의 위치가 서로 바뀌므로 헷갈리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과연 혼탕이라는 곳은 어떤 것일까. 그것이 없어진 이유는 불편해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성 관련 문제도 많이 발생했기 때문일까. 실제로 내가 노천 온천을 즐겨보니 어쩐지 여기에서 성추행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거나 커플이 몰래 스킨십을 하다 걸리는 상황이 자주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탕 속에 들어와 몸을 풀고 하늘을 보면서, 온천수가 흘러 들어오고 흘러나가는 흐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차분한 심정이 된다. 그것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과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온천 지역이라는 곳은 심신을 모두 정화하는 곳이다. 여성이 가득한 장소에서 온천을 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아무래도 느긋한 온천을 즐기기는 힘들다. 그래서야 굳이 이 먼곳까지 찾아오는 의미가 없어진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래도 한번쯤은 경험 해보고 싶지만.
아침부터 비가 한차례 쏟아진 뒤로 찬바람이 쌩쌩 분다. 탕 속에 숨어서 그런 삼엄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외따로이 단절된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귀에 부드럽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것은 특수한 온천수처럼 흐르는 자체적인 흐름처럼 느껴진다. 오늘자 뉴스에 따르면 인도에는 메뚜기 떼가 도심을 점령하고, 시카고에서는 영하 50도의 한파가, 알프스에서는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지구 멸망 시나리오가 착착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소식들이 마치 다른 국가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스부호처럼만 느껴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온천 내에서는 휴대폰을 소지할 수 없다. 그래서 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는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시간의 경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나무벽 위로 흐르는 창공의 변화뿐이다. 설풋 졸다가 눈을 뜨니 하늘이 전보다 점점 더 밝아져 있다. 이곳에서는 정말로 시간이 반대로 흐르는가. 시각의 방향성이란 사람이 그저 생활의 편의에 따라서 설정한 개념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가끔 위로도 아래로도 흐르는지도 모른다. 구름은 바나나 맛의 솜사탕처럼 노란 노을의 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쩐지 시계가 고지하는 시각보다 더 정직하게 시각을 표지한다. 지금은 아사히 병맥주를 마실 시간입니다. 어느새 주변을 둘러보니 온천 원숭이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온천 원숭이였는지도 모르겠다. 탕 속에 실례를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