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도
심야 버스 통신
지금은 하카타에서 오사카 우메다로 가는 야간 버스 안. 시각은 3시 23분. 물론 엄청난 한밤중이다. 창밖에는 도로 이정표도 여타 건축물의 흔적도 한동안 보이지 않고 있다. 그저 일본의 명물인 단조로운 대나무 숲과 허술한 가드레일만 끝도 없이 이어진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조이트로프 카메라처럼.
이렇게 야심한 시각의 숲속에는 이미 토끼도 사슴도 웅크리고 잠에 들었고, 까마귀도 조심스럽게 우는 시간이다. 헤드라이트도 암녹색 장막에 막혀 멀리 퍼져나가지 못하고 금세 힘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그저 수림의 어둠 속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온 세상에 버스 기사 아저씨와 부엉이만 깨어있고 모두 잠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고 깊숙한 어둠. 소곤소곤. 그리고 나도 몰래 살짝 깨어있다.
그래서 이 시간까지 내가 어째서 안자고 깨어있는가 그 이유를 설명할 차례다. 우선 자리가 굉장히 불편하다. 최대한 온건하게 말해서 더럽고 좁은 신발 속에서 전족을 당하는 발이 된 기분이다. 좁다란 좌석에서 다리도 못 펴고 어깨도 움츠린 구부정한 자세로 9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려니, 온몸이 두드려 맞은 북어처럼 찌뿌둥하다. 히터도 과하게 틀어져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양말 속에서는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팔짱을 지르고 가만히 누워 있는 모습이 꼼짝없이 관 속의 미라 꼴이다. 마치 성장기를 반대로 겪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다. 경험상 나는 그 어떤 온갖 상황에서도 결국 잠에 들 수 있었다. 수능 전날에도 그랬고 훈련소 첫날도 그랬다. 자는 일이 죽음처럼 무섭고 힘든 날에도. 그렇지만 오늘은 왠지 금방 잠에 들 수 없었다. 물론 엄청나게 피곤하다.
일본의 야간 고속 버스는 암막천으로 좌석의 안팎을 모두 가린다. 아마도 승객의 숙면을 위해 불빛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신기한 것은 우리나라와 달리 객차 내의 ’모든 커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암막은 운전석 뒤까지 이어져 승객석 전체는 하나의 도시락 통처럼 천장부터 바닥까지 빛의 침투를 막는다. 단순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곳에는 커다란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진다. 그래서 그것은 결과적으로 일종의 이중 어둠처럼 느껴진다.
하카타-오사카 야간 고속은 두 명의 운전수가 같이 버스에 오르고 가는 길에 몇 번씩 운전을 교대한다. 그런 이유로 정차시에 승객석을 점검하러 들어오는 사람도 당연히 중간중간 달라진다. 어둠을 손으로 살짝 가르고 바깥 세계와 접촉을 최대한으로 단절하며 숨어들듯 기어서 들어온다. 어쩐지 그는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속이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은 저 암막의 밖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올바른 목적지로 향하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9시간이나 외부와 격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암막을 열고 정갈한 모습을 드러내는 버스 기사는 어쩐지 우연히 운전수 역할을 맡게된 연극 배우처럼 극적이다. 마치 배우만 바뀌고 배역은 그대로 진행하는 부조리극처럼.
무력하다. 고작 불편스럽다는 이유로 솟구치는 짜증을 주체못하고, 빛을 차단당한 채 눈만 끔뻑이고 있는 상황. 암막의 조그만 틈으로 보이는 바깥의 스쳐 사라져가는 살풍경들. 떠내려가는 막막함을 바라보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조차 나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차창의 안쪽은 어둠, 바깥쪽도 어둠. 그리고 그 두 어둠 사이에 현실이 왜곡되는 무력감의 공간이 존재한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마비된 사람처럼 몸을 뒤틀고 시선을 한군데로 고정하는 일이다. 결국,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잠에 들지 않는 것이라서 나는 그것만을 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버스 기사는 운전을 하고 암막 커튼은 빛을 가리는 것이 역할이듯 나는 어둠을 응시한다. 그리곤 잘 기억하여 적바림해 둔다.
나는 이제 생각을 멈추고 농도 짙은 완벽한 어둠을 바라보며 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잠이라는 것은 정말로 저편 어둠에서 이편 어둠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4시 12분. 나는 지금 어디쯤일까.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