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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Aug 16. 2021

모든 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

오직 시간만 계획대로 흘러가지

여느 때보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유럽에 온 지 3일 차, 다행히 아직 나의 24시간은 온통 설렘으로 가득했다. 아침에 일어나 빵과 주스를 먹으며 여유롭게 준비를 하다 보니, 오늘 하루는 계획대로 순탄하게 흘러가겠거니 하는 나의 생각에는 일말의 의심조차 없었다.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바티칸 투어에 가기 위해 계획한 시간에 맞춰 지하철을 타러 나섰다.


숙소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시간, 이것을 계산하지 못한 초보 여행자의 실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럽은커녕 해외가 처음인 나에게 외국 도로는 퍽 낯선 곳이었다. 분명 한국에서는 길 잘 찾기로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한 나인데. 지도 앱을 켜고 걸어도 도저히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마 외국이라 긴장한 탓도 있을 터다. 한참을 헤맨 후 언덕 중반에 위치해있는 역에 도착해 열차를 기다리는데 웬 걸. 10분을 기다렸는데도 열차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 이곳은 로마 끝자락에 위치한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이었다.


내 마음도 모르고 애를 태우려는 작정인지 느릿하게 움직이는 열차에 몸을 싣고 30분쯤 갔을까,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미 투어 시작 시간보다 15분이 지나있었지만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만남의 장소로 향하는 내내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감춘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착한 곳엔 많은 투어사들이 고객을 확인하느라 여기저기서 이름을 호명하고 있었고, 나 또한 재빨리 눈으로 훑어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투어사를 찾기 시작했다. 섣불리 했던 나의 확신의 화살은 빗나가버렸고 이미 기차는 떠나고 없었다. 시간과 돈을 날렸다는 것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고, 들떠있던 내 마음을 저 끝으로 짓밟아 버리기엔 충분했다. 역사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전문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위대한 고대 유적을 관람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가장 기대했던 투어를, 이 꿈같은 기회를 한순간에 져버리다니.


가만히 후회만 하고 있기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나의 멍청함에 자책할 시간을 주는 것도 사치라 여겼다. 호스트가 준 지도를 펼쳐 들고 어디를 갈지 고민했다. 열심히 눈알을 굴리다가 발견한 '천사의 성'. 이름부터 예쁘다.






30분을 걸어서 천사의 성에 도착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관광객도 거의 없고 주변에 상점으로 보이는 것도 하나 없어서 관광지가 맞나 의심했다. 전날 갔던 콜로세움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입장료를 지불하면서까지 들어갈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잠깐 고민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그러니까 딱히 생각해놓은 대체재가 없어서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성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볼 수 있던 건 성 천사의 다리다. 천사가 좌우 대칭을 이루어 쭉 펼쳐져있는 긴 다리였는데, 아침 햇빛을 머금은 천사들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다리 밑에 강물은 햇빛에 반사된 채 빛을 뽐내며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여유로운 도시의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천사의 성에서 내려다본 성 천사의 다리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고 유명한 관광지가 모여있기 때문에 늘 현지인과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도시다. 길거리엔 나와 같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어대며 거리를 활보했고 그들 주위엔 조금이라도 더 팔아보겠다며 각종 화려한 스킬로 물건을 파는 잡상인들로 득실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에게 은근슬쩍 말을 걸며 물건을 파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에 그들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여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한동안 다리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래 이곳에는 관광객들이 많다고 한다. 특히 야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비 성수기이고 이른 아침이었다는 특수한 상황이 나에게 이렇게 특별한 여유로움을 선물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천사의 성 내부로 돌아와서, 천사의 성은 복잡한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다. 계단이 많아서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원래 이 건물은 황제의 묘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실제 묘로 사용된 기간은 60년이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묘라기엔 요새의 느낌이 더 강한 건물이다. 원통형으로 되어 있어 사방으로 적의 침입을 확인할 수 있고, 그 앞에는 성벽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어 든든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성 내부에는 과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금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방들도 관람할 수 있다.


복잡한 미로 속을 헤쳐 나와 대천사 미카엘이 기다리고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가는 문턱에 발을 들이밀었고, 그곳에서 나는 천상의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로마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로마에서 전망대라고 부를만한 곳이 딱히 없는데 여기가 최고의 전망대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사실 다른 도시의 전망대에 비해 높은 곳은 아니지만 로마의 건물들이 대체로 낮아서 시내를 관람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마치 나의 실패한 계획을 위로하듯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따스한 햇빛이 시내를 밝게 비춰주었다. 추운 기온이었지만 이날의 날씨는 그 어떤 여름날보다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로마 시내뿐만 아니라 내가 그토록 원했던 바티칸 대성당도 볼 수 있었다. 짧은 좌절을 등에 지고 마주한 바티칸 대성당은 이름값을 하는 듯 멀리서 봐도 웅장함이 느껴졌다. 대성당을 보자 바티칸 시티가 더욱 궁금해지긴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또 다른 아름다운 광경이 이 찰나의 아쉬움까지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오히려 투어를 가지 않고 이곳에 올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잔잔한 분위기 때문에 누군가는 천사의 성을 조용하고 재미없는 곳이라고 기억할 수도 있고, 나조차도 계획하고 이곳에 왔다면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천사의 성이 가진 여유로움과 조용함이 복잡했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거대하고 장엄한 콜로세움보다, 기원전 세워진 고대 신전 판테온보다, 우연찮게 마주했던 천사의 성이 로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 바티칸에 들어갈 수 없다면 멀리에서라도 보겠다 이거야.

저 멀리 보이는 바티칸 대성당



모든 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

그래도 그냥 흘러가게 두면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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