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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곡재 Mar 26. 2022

옥인아파트

5. 아주머니들 모두 건강하신가요?

1970년대에는 아파트가 흔치 않았다. 1980년대부터 강남이 개발되면서 아파트 붐이 불었으니 1970년대 아파트는 지금처럼 모든이의 로망이 아니었다. 마당이 넓은 단독주택이 더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시내 한복판 옥인동 산 3번지(물론 산꼭대기라 지금으로 치면 오지이지만 그땐 아니었다.)에 그것도 인왕산 기슭에 새로 지은 아파트였으니 제법 인기가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랬는지, 우연한 일이었는지 옥인아파트에는 꽤나 유명한 연예인들이 살았었다. 최불암 김민자 부부, 故 여운계, 양희은 양희경 자매, 오미연 등 내로라하는 인기 연예인들이 동네 주민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스타들이었음에도 우리는 싸인을 받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오다가다 마주치면 어색하게 '누군지 아는데'라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양희은씨는 큰 키에 멋진 청바지를 입고 기타를 둘러맨 모습이 정말 가수다웠다. 누구나 젊은 시절 목이 터져라 불렀던 '아침이슬', 기타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연주하며 흥얼거렸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인지 양희은씨는 옥인아파트에 아주 오래 살았던 것처럼 기억된다. 그런데 그때 나는 양희경씨가 누군지 몰랐다. 한참 후에야 양희은씨의 동생이라는 걸 알았고, '그럼 같은 동네 주민이었겠네' 생각했다. 양희경씨에게는 조금 미안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여운계씨는 당시 노인 역으로 최고의 연기자였다. TV에서 늘 할머니로 나왔는데 막상 동네에서 보면 너무 젊어서 오히려 현실이 가짜인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여운계씨는 아파트 언덕길 끝에 있는 비교적 넓은 공터(지금은 차 열 대쯤 주차하면 끝인 작은 공간이지만 당시 우리는 광장이라 불렀다)에서 남편 분과 배드민턴을 치곤했다. 그만큼 소탈했고, 연예인 같지 않았다. 훗날 내가 고등학교에서 만난 국어선생님이 여운계씨의 남동생이었다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하지는 못했다. 


오미연씨는 아담한 체구에 늘 웃는 얼굴이었고 동네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불암과 김민자 씨의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최불암씨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그저 오다가다 어쩌다 마주치면 '어! 최불암이다' 하는 정도였지만 그나마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시 최고의 인기드라마 <수사반장>에서 형사 반장으로 나왔기 때문에 촬영하느라 너무 바빠 동네에서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고, 그땐 탤런트가 아니라 경찰인 줄 알았다. 훗날 최불암시리즈라는 허무 개그가 한창 유행했었지만 그 땐 이미 두 분이 다른 곳으로 이사한 후였다. 하지만 김민자 씨에 대해서는 기억이 매우 생생하다. 같은 1동에 살았었다는 것과 아름다운 외모도 한몫했겠지만 나름의 스토리가 있다.


1970년대 중반 일본의 전기밥솥, 특히 코끼리표 전기밥솥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오죽하면 일본에 다녀오는 사람마다 양손에 코끼리표 밥솥을 하나씩 들고, 발로는 다른 하나를 굴리면서 입국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내의 많은 회사들이 전기밥솥 개발에 착수했고, 여러 회사들이 경쟁하게 되었다. SNS나 너튜브 같은 홍보는 상상도 못했던 당시는 TV( kbs, mbc, tbc)나 신문을 통한 광고가 최고였다. 


김민자씨가 아파트 부녀회의 대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김민자씨가 주축이 되어 옥인아파트 아주머니들로 구성된 주부합창단을 급조하여 전기밥솥 광고를 찍었다는 것이다. 광고의 내용은 옥인아파트에 살던 아주머니 십여 분(?)이 합창단원 복장(검은 스커트와 흰색 블라우스)으로 전기밥솥 홍보 노래를 하면, 김민자씨가 광고 멘트를 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이 광고 방송이 전국에 전파를 탔다. 그렇다고 그 아주머니들이 스타가 되었거나 대중의 관심이 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다만, TV광고에 동네 아주머니, 아는 분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111호)를 포함하여 삼총사로 불린 101호, 131호 아주머니는 합창단으로 활동했는데, 우리 엄마만 아니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난 평생 우리엄마가 노래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당신이 음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지 노래하는 걸 엄청 싫어했다. 오죽하면 회갑잔치에서 하객들이 노래 요청을 했는데, 이리 빼고 저리 빼면서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참석한 친척들 모두가 조용히 무슨 노래가 나올지 기다렸다. 정적이 흐르던 분위기는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박장대소로 바뀌었다. 우리 엄마는 마이크를 잡고 몹시 긴장한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로 "산토끼 토끼야 어데를 가느냐~~~~" 산토끼 노래를 불렀다. 


옥인아파트 1동 삼총사는 30여 년을 이웃사촌, 아니 자매로 살았다. 우리엄마는 돌아가신 지 벌써 8년이 되었고, 131호 아주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신다고 들었다. 131호의 하나뿐인 딸(당시 인기 잡지 <여학생>의 표지 모델)이 압구정동에서 유명 식당을 경영하고 있어 가끔 들러 옛날이야기를 하곤 한다. 101호 아주머니는 무릎이 안좋으셔서 외출이 어렵다는 소식만 들었다. 101호의 막내가 그 집의 유일한 아들이었는데, 나의 사촌동생과 고등학교 동창이라 가끔씩 소식을 전해 듣곤 한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두 분이 어렵게 힘들게 문병을 오셔서 오랜만에 삼총사가 뭉쳤다. 그때 우리엄마가 나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머니들이 우리집으로 오셨고, 아주 오랬만에 두 분을 뵐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벌써 10년이 지난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1동 삼총사는 서로 형님 동생하면서 개울가에서 빨래도, 한겨울 김장도, 장마철 부침개도 같이 했고, 잠깐이라도 틈이나는 시간엔 점 10원짜리 고스톱까지 반평생을 함께했다. 두 분이 건강하게 여생을 보내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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